개화기 신문제작 1등 공신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신문야사]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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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문제작 1등 공신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신문야사]

개화기 신문 편집·제작의 유일한 전문가

이노우에 가쿠고로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중년 때 모습. ⓒ황인환

조선 개화기의 신문 제작을 말할 때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만큼 개화기 신문 제작의 전문가로 <한성순보>나 <한성주보>가 거의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일본의 대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박영효의 요청으로 조선에 특별히 파견한 7명의 신문 제작 기술자 중 특파원 기자이자 신문 편집 전문가였다.

그는 한글을 배워가면서 신문제작에 최선을 다 했다. 비록 조선 근대화의 격동기에서 그가 일본의 정한(征韓) 정책에 일조했으리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한성순보>를 창간하고 중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우리나라 고유의 독립성을 가진 신문 제작을 위해 국·한문혼용체까지 개발하여 <한성주보>를 복간하고, 개화기의 신문물인 신문의 위상을 국민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으로 보면 그는 조선 근대화의 공로자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외무아문 관료로 발탁되어 신문 제작 전담

이노우에 가쿠고로(1860년~1938년)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게이오기주쿠 출신의 엘리트이다. 그는 1883년 1월 24세의 나이로 수신사 박영효의 요청으로 서울에 들어와 유길준과 함께 <한성순보> 창간 작업을 돕는다. 그는 박영효의 소개로 외무아문협판 김윤식과 알게 되어 외무아문 고문의 직책도 얻어 조선의 관료로서 신문제작을 주도했다. 유길준과 더불어 한성부 신문국에서 최초의 신문 창간 작업에 열중하던 중 수구파의 모략으로 신문 발간 책임자인 한성판윤 박영효가 갑작스럽게 광주유수로 전보되고, 유길준도 칭병하여 사직하면서 신문 창간작업이 중단되자 나머지 일본 동료들은 모두 일본으로 되돌아 갔는데도 그만 홀로 조선에 남아 신문 창간 시기를 기다렸다.

그는 새로이 한성판윤에 임명된 김만식(金晩植)과도 친분을 맺어 <한성순보> 새 창간팀에 고문으로 합류하여 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고문이라지만 실제적으로는 편집 제작을 총괄하는 요즘의 편집국장이나 다름없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신문관 이어받아

일본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조선의 신문 창간에 전력을 다해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신문인으로서 순수한 개인적인 사명감일수도 있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필두로 한 일본 지도층의 대조선 책략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
사무라이 시절의 이노우에 가쿠고로. ⓒ황인환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개화가 일본의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믿고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고(당시 조선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속국으로 인식되었음) 조선의 문화와 언어를 일본에 가깝게 접근시키려고 힘쓴 선각자다. 그는 일본에 최초의 사립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했으며, 조선의 젊은 개화파 인사들에게까지 많은 교류를 통해 영향을 미쳤다.

유키치는 초기에 정한론(조선에 대한 공략론)에 반대했다. 김옥균, 서재필 등 조선의 젊은이들을 만나보고 조선은 개화에 희망이 있다고 기대하며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자 했다. 조선이 건재해야 서세동점의 국제 조류에서 일본의 자주를 지킬 수 있다는 소위 순망치한(脣亡齒寒)적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훗날 이들이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조선 조정이 이들과 그의 직계 가족들에게 가한 잔혹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을 보고 조선을 야만국으로 판단, 갑자기 정한론으로 돌아섰다고 전해진다.

초기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개화에 필수적인 것이 신문의 보급이라고 생각했다. 신문을 통해 조선이 자주국임을 일깨워 종주국 행세를 하는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국·한문 혼용을 통한 신문 언어의 동질화로 조선과 일본의 문화동질화를 유도해 결국 조선을 친일 쪽으로 기울게 하려했다. 조선을 문화식민지화하려는 원대한 전략의 하나였다. 조선에서 신문 창간에 관여하며 이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포석으로 곧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심어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바로 그런 목적에서 신문 제작에 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논란이 된 반(反)중국적 편집 태도

한성순보
<한성순보> 편집실의 모습 ⓒ황인환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성순보> 창간에 참여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주문을 충실하게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에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려다가 실패했으나 연호 사용이나 편집 기술면에서 미묘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반중(反中) 편집 태도를 견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한성순보> 창간호에 ‘조선개국 492년 계미 10월 초1일(朝鮮開國 四百九十二年 癸未 十月 初 一日)’이라고 조선 고유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정치적으로 청국이 조선을 종주국화 시킨 상황에서 청나라 연호 광서(光緖) 대신 조선 개국 연호를 썼다는 것은 엄청난 결정이었다. 당시에는 광화문 바로 뒷문이 원래 홍례문(弘禮門)인데 홍(弘)자가 청나라 건륭제의 홍력(弘曆)에 기휘(忌諱)된다고 하여 흥례문(興禮門)으로 바꾸었고, 심지어는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이름까지도 김굉집(金宏集)으로 고쳐야 할 정도의 서슬 퍼런 세상이었다.

그런데 광서 연호를 무시하고 조선 개국 연호를 썼다는 것은 박문국 독단의 결정으로는 불가능했다. 권력 최상층의 윤허 없이는 불가능한 결정이었다. 이 발상의 중앙에 이노우에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신문이란 원래 열국에까지 반포되는 물건이므로 국제 관례적으로 그 나라의 고유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이노우에 고문의 주장이 있지 않았을까? 중국 연호를 썼다면 그것은 중국 신문이되기 때문이다.

 

<한성주보>에 국·한문체 문장 도입

이노우에 가쿠고로,서울에 남겨둔 꿈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쓴 <서울에 남겨둔 꿈> ⓒ황인환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1884년 1월 30일 <한성순보> 제10호에 화병범죄(華兵犯罪)라는 제하의 기사에 청군의 행패를 보도한 것과 이후 후속기사로 그들을 징치한 사실을 게재한 것에 대하여 청군이 박문국을 습격하고 청나라 조정의 항의를 받게 되어, 정부는 이노우에를 문책하고 박문국 고문직에서 해임했다. <한성순보> 최초의 필화사건이다.

그는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돕다가 정변이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자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1885년 1월 갑신정변 때 일본이 입은 피해 보상을 따지기 위해 조선에 온 일본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취재하기 위해 일본 <지지신보(時事新報·후쿠자와 유키치 소유)>의 특파원 자격으로 서울에 다시 들어왔다. 그는 이 협상(한성조약)에서 조선의 입장에 편들어 혁혁한 공을 세우고 다시 조선 조정의 신임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여 <한성주보>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갑신정변 직후 통리아문독판이 된 김윤식은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전폭적으로 신임하여 <한성순보>의 복간을 추진하면서 그를 일본에 보내 활자와 인쇄기를 구입해 오게 하고 1886년 1월 <한성순보>의 복간 형태인 국·한문혼용의 <한성주보 漢城週報>를 창간하는데 이노우에를 편집주사 즉 편집국장에 다시 앉혔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한글학자인 강위(姜瑋)를 한글 스승으로 모시고 일본식 국·한문체 문장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조정의 지지와 고종의 윤허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여 기어이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한성주보>를 창간했다.

이는 한국 신문 발전사에 큰 공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조선 정벌의 책략에서 보면 당시 한자를 상용하던 조선을 중화문화권에서 떼어내어 한자와 가나를 혼용하는 일본문화권으로의 편입을 꾀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이노우에는 국·한문 혼용체 개발을 자기의 가장 큰 업적으로 내세웠다. 한글과 일본어는 어문 구조와 문법이 유사하다는 점도 이 작업을 더욱 쉽게 만들었다.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1886년 1월 한성주보가 창간된 후 그해 12월 일본으로 귀국한 후 1890년부터 14번이나 일본 히로시마 현의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정계를 은퇴한 후에는 일본제강회사 사장과 일본페인트회사 회장을 역임했으며, 경부선과 남만주 철도부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그의 저서로는 <서울에 남겨둔 꿈(漢城之殘夢)>, <조선조 망국 전야기(朝鮮朝亡國前夜記)> 등 많다.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신문 제작 공적 인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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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쓴 <후쿠자와 유키치 선생의 조선 경영과 현대 조선의 문화에 대하여> 중 제5회 <새롭게 한언(漢諺·한문과 언문)혼합 문체를 만들어 <한성주보>.를 발행하다>는 제하의 글. ⓒ황인환

언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의 한국 언론에 대한 공적은 미국 선교사 알렌 등이 조선에 서양의학을 전수한 것과 맞먹는것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문의 사회적 공헌도로 미루어 봐도 전혀 손색없는 공적이며, 그가 신문에 조선의 연호를 사용하고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기조 위에 모든 기사를 편집한 것은 국민들에게 독립국의 자유민 의식을 고취시킨것이 분명하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치적으로 알렌과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했지만 그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모든 업적이 폄하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물론 이노우에가 훗날 정한론을 편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시대로 조선을 청국과의 종속관계에서 떼어내 독립시키고 일본과의 병합을 염두에 두고 이 모든 일을 추진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당시에 그런 숨은 책략이 있었는지는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더 필요할 것이다.

 

최초 신문이 <한성순보>이라면 현행 <신문의 날>도 고쳐야

현행 신문의 날도 <독립신문>의 창간일인 4월 7일이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의 창간일인 1882년 10월 30일을 신문의 날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재 기념하고 있는 신문의 날은 <독립신문> 창간 61주년을 기하여 4월 7일로 제정한 것인데, 이날은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일이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며, 순한글 신문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독립신문> 창간 자금도 모두 조선 정부가 부담했었다. 역사학자들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을 <한성순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신문의 날도 <한성순보> 창간의 날로 정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