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취재기① 그해 5월의 광주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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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취재기① 그해 5월의 광주


광주가 피로 얼룩진 5.18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지 올해로 어언 36년이 되었다. 여느 도시처럼 학생 시위로부터 촉발된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6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27일까지 12일 동안 외부와 모든 통신, 교통이 두절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당시 광주 현장을 다녀온 기자의 취재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그해 5월은 유난히도 푸르렀다

계절의 여왕 5월에 푸르지 않는 곳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1980년 한국의 5월은 그 어느 해보다도 푸르렀다. 불과 7개월 전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10.26 사태) 이후 많은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부활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물론 대학생과 일반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명실상부한 민주 정부 탄생을 기대하며 부푼 꿈에 젖어 있었다. 그들의 꿈은 그만큼 푸르렀다.

그러나 상황은 국민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10.26 사태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으로 국회가 해산된 가운데 국민의 모든 집회와 결사, 언론의 자유가 철저히 계엄군에 의해 통제되었다. 일체의 정치 활동은 물론 모든 언론은 의무적으로 계엄 사령부의 사전 검열을 받도록 강요되었다. 특히 언론이 제1의 가치로 추구하는 표현의 자유는 여지없이 통제되었다. 그것은 정치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언론 통제
10.26 사태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으로 일체의 정치 활동은 물론 모든 언론은 의무적으로 계엄 사령부의 사전 검열을 받도록 강요되었다. ⓒYavuz Sariyildiz/Shutterstock

각 언론사에는 이미 박정희 유신 정부 시절부터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와 보안사(현 기무사), 치안 본부(현 경찰청) 등에서 나온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맡은 언론사 대표 및 주요 간부들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그날 그날의 보도 내용을 면밀히 체크해 상부에 보고했다. 극도의 언론 통제로 숨 막히는 정국이 끝없이 이어졌다.

1980년 5월, 필자는 동양 방송(TBC, 현 JTBC의 전신) 보도국에서 주로 TV 뉴스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5년 선배인 한종범(전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총장) 기자와 한 조(組)를 이뤄 저녁 9시 메인 뉴스인 <TBC 석간> 같은 뉴스 프로를 진행하고는 했다.

그 무렵 국내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었다. 학원가에서는 계엄 해제와 정치 일정 단축 등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주장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계엄 당국은 언론에 대한 검열의 수위를 더욱 강화했고, 이에 저항하는 언론과의 대립과 갈등은 점점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계엄 해제를, 언론인들은 검열 거부 및 철폐를 요구했다.

필자는 그 때 서울 시청 3층에 설치된 계엄사 검열단 출입 임무를 과외로 맡고 있었다. 매 시간 TV와 라디오 방송에 나갈 기사 원고를 들고 사전 검열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당시 검열단 출입은 수습(修習)기자 생활을 마친 신참(新參) 내근(內勤) 기자들의 몫이었다. 시청 검열단에는 육군 대령을 단장으로 그 밑에 수십 명의 검열관(대부분 정훈장교)들이 각 언론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각 언론사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원고를 들고 가서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다. 라디오 방송의 경우 매 시간마다 기사 검열을 받았다. 신문, 방송, 잡지 그리고 통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디어들이 예외 없이 검열단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으면 보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검열 과정에서 기사가 원안대로 통과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
전남도청 앞 분수대 주위에 모여있는 시민들. 당시 광주 인구 80만 가운데 10만 이상이 이곳에 모여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5월 22일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 촬영.

광주 사태 고급 정보, 검열단서 귀동냥

‘부분 수정’이나 ‘부분 삭제’ 등 조건부 통과가 대부분이고, ‘전면 삭제’도 적지 않았다. 검열단을 출입하면서는 사소한 표현 하나를 놓고도 담당 장교들과 언쟁을 벌이는 일이 허다했다. 얼마쯤 다녀보니 필자도 기사를 보면 그것이 검열단의 가이드라인에 어느 정도 맞을지 알 수가 있었다.

검열이 끝나면 기다리고 있는 각 부 데스크들에게 검열 결과를 신속하게 전해줘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제작 공정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네 시장처럼 사람들로 북적대는 검열단 사무실에서 전화기로 통화하기란 여간 힘들고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보도국에서 지급해 준 고성능 무전기 덕을 톡톡히 봤다. 20cm 길이의 직사각형 검은색 무전기는 지금의 스마트폰 같은 첨단 기기였다. 당시 TBC 기자들만 가지고 있었다. 검열단 장교와 타사 기자들은 물론 정보 기관원들조차도 부러워했다. 하지만 무겁고 커서 들고 다니면 금방 노출되는 게 큰 단점이었다.

그 무렵 필자는 서울에 있으면서도 광주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광주에 내려간 취재팀의 정보 보고와 시청 검열단에서 귀동냥한 정보를 종합해 보면 광주의 윤곽이 대충 그려졌다. 5월 16일 광주 금남로에서 있었던 횃불 대행진 사건도 한 검열관에게서 들은 특급 정보였다.

당일의 보도 지침은 검열단 사무실 벽에 공시(公示)하지만 특별히 대외비로 분류하는 지침도 있었다. 하루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한 검열관이 필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즉, 비보도(非報道)를 전제로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는 다음과 같이 귀띔해 주는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
5월 19일 한 계엄군이 페퍼포그 사량 옆에서 아루런 저항 의지도 없는 학생을 향해 곤봉으로 힘껏 내려치고 있다. 이 군인은 적십자 완장을 찬 위생병으로 알려졌다. 전남일보 나경택 기자 촬영.

5월 16일 오후 금남로 도청 앞 광장에는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 시내 각 대학생 2만여 명이 ‘계엄 해제’ ‘민주화 일정 단축’ 등 구호를 외치며 시국 성토 대회를 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은 “국가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전원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하겠다”는 결의와 서명을 했다.

이어 날이 어두워지자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경찰은 데모대가 차도로 뛰쳐나오지 못하게 하는 한편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오열(五列)의 침투를 막기 위해 행진 대열을 호위하며 따라갔다.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학생 데모 가운데 경찰이 데모대를 엄호해 주는 광경은 이곳이 유일했다. 보고를 받은 계엄 당국은 큰 위기 의식을 느꼈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생들은 시위가 끝난 후 금남로 일대를 말끔히 청소했다. 또 즉석에서 성금(10만원 정도)을 거둬 경찰 측에 전달했다. 횃불 행진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오열의 침투 방지를 위해 애써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행사 마지막에는 ‘5.16 화형식’도 가졌다. 이날의 횃불 시위는 ‘민주화 성회(聖會)’로 이름 붙여졌다. 그날 광주에서 있었던 이 같은 사실은 어떤 매체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사전 기사 검열에서 삭제됐기 때문일 것이다.

5월 21일(수)은 음력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광주에 내려간 성창기 기자가 어렵게 전화로 현지 상황을 전해왔다. 보도국에서 그것을 받아 적으면서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초파일의 유혈극’으로 알려진 그날 공수 부대의 살육전 얘기는 듣기만 해도 온몸에 치가 떨렸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필자는 동(洞) 이름만 들어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기자는 현장으로’ 소신 내세워 혼자 광주행

그러한 광주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광주 시내 병원마다 대검에 찔리고 총에 맞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미처 병상을 구하지 못해 밖에서 기다리는 부상자들도 끝없이 이어졌다. 이들에게 헌혈을 하겠다며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충장로 뒷골목의 직업 여성들도 길게 줄을 이었다. 아침부터 외부로 통하는 고속버스 전 노선은 운행이 중지됐다. 그러나 이런 사실 역시 전혀 기사화되지 못했다. 그 대신 어디에선가 만들어진 정체 불명의 기사가 국민들에게 전달됐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
여성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시내 병원 곳곳으로 몰려들었다. 5월 22일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 쵤영.

필자는 그날 저녁 결심했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똑똑히 봐야겠다고. 기자라면 당연히 역사의 현장을 가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1년 전 한남동 육참 총장 공관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12. 12 사태) 당일 밤에도 필자는 밤 9시 뉴스 진행을 마치고 현장을 가겠다고 당시 정치 부장에게 말했다가 위험하니 절대 가지 말라고 말리는 바람에 못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필코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직속 부장(정종진)에게 “외할머니가 위독하니 주말을 이용해 다녀오겠다”고 말했더니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했다. 부장에게 거짓말을 하고 잠시 근무지를 이탈한다고 큰일이야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기자는 언제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진 채 같은 팀 선배에게조차 비밀로 했다.

5월 24일 오전 11시,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먼저 전주로 향했다. 21일부터 이미 광주행 정기 노선 버스는 모두 끊어졌기 때문이다. 오후 2시 경 전주에 도착, 점심을 먹은 후 3시 조금 지나 정읍(井邑)행 버스를 탔다. 거기만 가면 어떻게 하든 광주행 교통편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정읍에 도착해 돌아가는 얘기를 들어보니 사정은 전혀 달랐다.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광주 주변 어느 곳도 당일에 도착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예정에 없던 여관 신세를 하루 더 져야 했다. 짐은 단촐했다. 여행용 가방에는 소형 카메라와 녹음기, 며칠간 갈아입을 속옷과 세면 도구가 전부였다.

내일을 생각해서 일찍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제발 길이 잘 통해 광주까지 무사히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쩔지 모르겠다며 잠을 청했지만 쉽사리 잠은 오지 않았다. 정읍사(井邑詞)의 고장 정읍은 광주의 슬픔을 벌써 알고 있는지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이따금씩 개 짖는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 사방은 무서우리만큼 조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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