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취재기② 금남로, 초파일의 유혈극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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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취재기② 금남로, 초파일의 유혈극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
1980년 5월 16일 전남대 교수들이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나서 시내 금남로로 향하고 있다. 그 뒤를 학생들이 따르고 있다.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나경택 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518기념재단에서 발간한 사진집에서 발췌.

금남로, 초파일의 유혈극

1980년 5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찍 아침을 먹고 8시 47분 전남 장성(長城)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읍에서도 역시 광주행 직행 버스는 없었기에 불가피 장성을 거쳐 가야 했다. 일단 장성으로 가면 광주는 손 안에 들어올 것이다. 불과 30여 분이면 당도할 짧은 거리였지만 버스 안에서 내내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다. 카메라며 녹음기 등을 만지며 취재 의욕을 다졌다.

광주에 한 발 가까이 다가와서인지 장성의 분위기는 정읍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의 표정부터가 긴장으로 가득 차 있고, 웃는 얼굴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장성에서도 역시 광주행 직행 버스는 일찌감치 끊어진 상태였다. 택시를 잡고 사정을 했더니 광주 시내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고 잘하면 송정리까지는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가기로 흥정하고 택시를 탔다. 광주가 가까워졌을 무렵, 얼굴에 위장 크림을 바른 군인들이 나타나 차를 세우더니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계엄군의 검문이었다. 굳이 신분을 속일 필요가 없어 “TBC 기자인데 광주 취재차 가는 중”이라고 말하자 별다른 반응 없이 통과시켜 주었다. 이 때 ‘기자’라는 말을 들은 택시 기사가 오히려 내게 “광주 가거든 몸조심하시라”고 당부했다.

이윽고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송정리역 바로 앞에 눈에 익은 ‘중앙일보 동양 방송’이라고 쓴 파란색 취재 차량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마치 고립무원의 적진에서 지원군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필자도 모르게 취재차를 향해 달려갔다.

이 때 오홍근(吳弘根, 김대중 정부 국정 홍보처장, 청와대 홍보 수석) 차장이 먼저 필자를 알아보고는 “너 여기 어떻게 왔어?”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위험한 곳을 어떻게 너 같은 올챙이 기자가 혼자서 왔느냐?’는 우려의 뜻으로 한 말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현지 취재팀장을 맡고 있던 오 차장으로서는 필자의 광주 잠입(潛入) 사실을 보도국장에게 보고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오 차장은 박충(촬영 기자), 한준엽, 성창기 기자 등과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지난 20일 광주에 도착해 벌써 5일째 이곳저곳을 다니며 취재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필자는 자연스레 취재팀 선배들과 합류했다. 화정동까지는 차를 타고 갔지만 거기서부터 광주까지는 걸어서 가야했다. 시내로 가는 차로에는 전봇대만한 목재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어 차량은 일절 다닐 수가 없었다.

총으로 의한 유혈사태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을까. ⓒwk1003mike/Shutterstock

우린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오후 1시 쯤 우리 일행은 광주 신역에서 가까운 중앙일보 광주 지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광주 주재기자(김국후 등)로부터 현황 설명을 들었다. 최근 며칠간 광주의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상상 이상이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떨렸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더니 나중에는 공포심으로 바뀌었다. 브리핑을 하는 기자 역시 시종일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브리핑을 들은 뒤 성창기 기자와 필자는 오 차장을 따라 금남로 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박충, 한준엽 두 기자는 외신들과 함께 시민군 공보팀의 안내를 받았다. 금남로 주변에는 온통 플래카드와 벽보, 현수막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도청 앞에서 금남로를 바라보면 좌우로 YMCA와 YWCA-전일 빌딩-관광 호텔-한국 은행-제일 은행-가톨릭 센터 등이 줄지어 서 있고 도청 앞 분수대 바로 오른쪽에는 유도장인 상무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용하던 빛 고을 광주의 중심가 금남로에는 “민주 시민 만세’ “비상 계엄 해제하라” “유신 잔당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승리의 그날까지” 등과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는 빨간 페인트로 “살인마 전두환 찢어 죽이자!”라고 쓴 선홍색 글씨가 마치 피를 토해낸 듯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
80년 5월 20일 도청앞 광주관광호텔 앞에 버스가 멈춰서자 계엄군이 사과탄을 버스 안으로 던져넣고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당시 중앙일보 이창성 기자 촬영

오후 3시 30분부터 도청 앞 광장에는 10만 명이 넘는 시민, 학생들이 궐기 대회를 열고 있었다. 23일에 이은 제3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 대회였다. 시민군 대표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를 낭독하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 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차에 깔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에게까지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궐기 대회를 보고난 뒤 필자는 TBC 취재팀과 함께 시민군 지도부가 있는 도청 건물 안으로 들어가 봤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아침 도청에서는 난 데 없는 ‘독침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어수선하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나중에 밝혀진 이른바 독침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그날 아침 8시경 장계범(당시 21, 황금동에서 술집 경영)이라는 자가 어깨를 움켜쥐고 도청 농림 국장실로 쓰러지듯 들어오면서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경비 중이던 시민군(신만식, 방위병)이 어깨를 살펴보려 하자 장계범은 “너는 필요 없어!” 하면서 옆에 있던 정한규(23, 운전사)를 지목했다.

정 씨가 그의 웃옷을 벗겨 상처 부위를 몇 번 빨아낸 다음 부축하여 밖에 대기 중이던 차에 태워 전남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후 도청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혼란으로 빠져들었고 상당수 시민군들은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한 것 아니냐”며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독침 사건은 계엄군측이 바로 이런 결과를 노리고 꾸며낸 고도의 교란 작전이었다.

그날 도청 앞 금남로에서 필자가 본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시민군 지도부의 상황 실장 박남선 씨의 모습이다. 지금도 뚜렷이 떠오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푸른 군복에 베레모와 검은색 안경을 쓰고 지휘봉까지 들고 다녔다.

 

상무관, 처참히 죽은 시신들로 통곡의 도가니

때마침 그가 야전 지프차에 오르는 모습을 봤는데 정말 한 편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면이었다. 그때 나이 스물 여섯의 골재 차량 운전사 출신이었다. 25일 밤에 발족된 민주항쟁지도부에서는 시민군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계엄군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광주에서 일시 퇴각한 22일부터 시민군 지도부는 현지에서 활동 중인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매일 매일 노란색 보도 완장을 교체해 주고 있었다. 완장 교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이뤄졌다.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보도한 언론사 기자에게는 완장을 채워 주지만 그렇지 않은 언론사 기자에게는 완장을 주지 않았다.

광주 어디를 가더라도 완장 없이는 취재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일부 국내 언론들은 현지에서 활동 중인 외국 언론사 기자로 위장해 완장을 받아내는 편법을 쓰기도 했다. 당시 광주에 와 있던 외신들은 시민군과 계엄군 양쪽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취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반면 KBS와 MBC, 그리고 일부 국내 신문 등은 끝내 완장을 받지 못했다. 성난 시위 군중들은 이미 5월 20일 광주 동구 궁동의 MBC 건물을, 21일은 KBS 건물에 불을 질렀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을 왜곡해서 보도한 데 대한 시민적 공분(公憤)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동양방송(TBC)은 취재 완장을 받을 수 있었다.

오 차장을 비롯한 우리 취재팀은 각자 완장을 팔에 차고 도청 앞 우측에 있는 상무관으로 향했다. 그곳은 본래 유도장으로 광주에서는 손꼽히는 체육관이었다. 그러나 상무관은 이미 커다란 장례식장으로 변해 있었다. 수많은 유가족과 어지럽게 널려 있는 관(棺)들, 그리고 아직 입관(入棺)을 못했거나 할 수 없는 시체들도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광주민중항쟁 기록사진.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 수거해 놓은 주검들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유가족들이 모여 있다. 5월 27일 전남일보 나경택 기자 촬영.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수많은 시체들 가운데 그나마 총에 맞아 죽은 시신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편이었다. 칼에 찔렸거나 심지어 내장이 터진 사람, 몽둥이로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퉁퉁 부어 있는 사람 등 그날 상무관에서 본 시체만도 수 십 구는 족히 되었다.

통곡과 절규, 비탄과 눈물로 뒤범벅이 된 상무관은 온통 죽음의 계곡이었다. 오열하는 유족에게 조심스레 말을 붙여보려 했지만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내가 말하면 보도나 할 수 있는 겁니까?” 제대로 보도도 못할 거면서 뭘 묻느냐는 식의 차가운 말투였다. 시내 어딜 가도 그런 경우를 수없이 맞닥뜨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도 기자 개인이 아닌 당시의 상황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오홍근 차장은 2011년 5월 20일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오홍근의 그레샴 법칙의 나라<27>)

“그 때 광주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내가 기자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기사 한 줄 보도할 수 없는 ‘거세된 무정란’ 기자였다. 마음 놓고 취재 수첩에 메모도 못했다. ‘보도할 수 있느냐?’는 악에 받친 시민들의 핀잔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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