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취재기③ 짓밟힌 민주의 꿈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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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취재기③ 짓밟힌 민주의 꿈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태극기를 중심으로 둘러서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나경택 기자가 촬영.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태극기를 중심으로 둘러서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나경택 기자가 촬영.

열흘 만에 짓밟힌 민주의 꿈

우리는 광주에 있는 동안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다녀야 했다. 시내에서의 최루탄 가스 탓도 있었지만 생전 보지 못한 처참한 광경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대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독하다는 소리를 듣던 오홍근 차장도 평소와 달리 후배들 앞에서 체면 가리지 않고 연신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다녔다.

상무관에는 광주 시내뿐 아니라 주변 곳곳에서 수거한 신원 미상의 시신들을 잔뜩 옮겨다 놓았다. 망자들의 피해 상황이나 사망 경위 등도 제각각이었다. 필자는 이른바 ‘초파일의 유혈극’이 자행된 5월 21일 이후 현지에 갔기에 그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 차장을 비롯한 선발대는 광주 진입 바로 다음날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전했다. 훤한 대낮에 속옷만 입은 채 벗겨진 수십 명의 젊은 남녀가 공수대원들로부터 곤봉 세례를 맞고 피가 튀기는 모습을 숨어서 봤다고 했다.

광주는 오후 7시 모든 통행이 금지됐다. 그 이전에 모든 활동을 마쳐야 했다. 필자는 취재팀 일행과 함께 상무관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민가에서 숙박을 했다. 그냥 민박이 아니라 우리 일행인 한준엽(韓准燁) 기자의 고모 댁이었다. 한 기자는 광주 출신으로 광주 제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를 나와 중앙 매스컴 12기로 입사해 TBC 보도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25~26일 이틀 동안을 그 집에서 묵었다.

25일 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상무대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해 소준열(蘇俊烈) 계엄분소장과 장형태 전남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 받은 뒤 9시부터 TV와 라디오를 통해 세 차례에 걸쳐 80만 명이 거주하는 광주 지역에만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실권 없는 최규하 대통령의 호소

최 대통령은 “시민들이 냉정과 이성을 되찾아 불안한 사태를 수습해 주기 바란다. 장기화되면 국가적으로 위기가 올 수도 있으니 일시적인 흥분을 가라 앉히고 자제로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이어 “일시적인 잘못이 있더라도 정부는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불문에 부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에게 아무런 실권이 없다는 사실은 광주 시민들도 다 알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도시는 깜깜한 암흑 천지로 변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처음에는 ‘탕, 탕’ 하고 몇 번 들리더니 이윽고 ‘탕-탕-탕’ 하며 연발로 쏘아대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묵고 있는 고모 댁의 누군가가 “사직 공원 쪽에서 나는 소리”라고 말했다. 간단없이 들려오는 총소리에 개들도 덩달아 짖어댔다.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는 밤의 정적(靜寂)을 무참히 깨버렸다. 외부와의 통행도, 통신도 끊겨버린 고립무원의 도시 광주에서의 첫 날 밤은 그렇게 어둠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27일의 광주는 퇴각해 있던 계엄군의 탱크 소리와 함께 밝았다. 새벽 5시경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은 금방 광주 전역에 퍼졌고, 시민들은 하나 둘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이자 예정에 없던 범시민 궐기 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시내 진입은 협상을 위반한 것이라며 이를 규탄하고 ‘전 언론인에게 보내는 글’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내는 글’ 등을 채택했다. 이어 태형 태극기를 앞세운 채 전남대 스쿨 버스와 1000여 명의 고등학생을 선두로 시민 전원이 시가 행진에 돌입했다. “우리는 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 “무기 반납은 절대로 안 된다” 등의 구호와 함께 ‘우리의 소원’ 등 노래를 불렀다. 금남로를 출발해서 시내 주요 지점을 돌아 다시 도청 앞 광장에서 모였다. 외부와의 통신이 끊어지자 취재팀은 광주 경찰서와 내무부 기자실로 통하는 핫라인을 이용해 본사는 물론 서울에 있는 자기 가족과도 통화할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취재팀은 전날과 같이 도청 앞에 나가 시민군 측에서 재발급해 주는 취재 완장을 바꿔 차고 일과를 시작했다. 금남로, 충장로를 비롯한 시내 중심가의 벽마다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 발간하는 해외 유력 신문들이 요소요소에 붙어 있었다. 원문 옆에 한글 번역본도 나란히 붙여 놓았다. 시민들은 그것을 보고 광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전남도청 앞에 손이 묶인 채 엎드린 시민들
1980년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 뒤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도청 마당에 엎드려 있다. 사진은 김녕만 기자가 촬영.

 여대생의 절규,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국내 언론과 달리 그들은 광주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도했고, 그래서 그들은 시민군 측으로부터 아낌없는 취재 지원을 받아가며 현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사실대로 보도해 주니 취재를 도와줬고, 사실을 왜곡해서 보도하니 취재를 통제한 것이었다. 한쪽은 선순환, 다른 쪽은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자국민으로부터 불신 받는 언론은 얼마나 부끄러운가? 오 차장을 비롯한 공식 취재팀이 광주에 내려온 지 벌써 6일째가 됐지만 처음부터 아예 기사를 쓸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광주 내려올 때 부장으로부터 “아예 기사 써서 보낼 생각 말고 가끔씩 상황 보고만 해 달라”고 주문을 받았었다. 그만큼 상황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26일 늦은 오후쯤, 오 차장은 서울 본사에서 “곧 계엄군이 쳐들어갈 테니 빨리 광주를 빠져나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보다 한 발 앞서 취재팀의 박충 기자(촬영)도 미국 성조지(星條紙, the Stars & Stripes) 기자로부터 ‘계엄군 진입’ 정보를 먼저 들었다. 몇 시간 뒤 그 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우리는 26일 밤 자정 무렵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가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으니 전 시민은 무기를 들고 나가 싸웁시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무장한 시민군을 계엄군이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계엄군의 광주 탈환 작전은 시간 문제일 뿐 언젠가는 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날 역사적인 가두 방송을 한 사람은 당시 송원 전문대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영순(21) 양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박 양의 목소리는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듣는 이의 가슴을 흔드는 호소력이 있었다.

박 양의 가두 방송을 듣고 도청으로 향해 가던 수많은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계엄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사살되기도 했다. 그날 새벽 4시가 넘어서 시민군 지휘 본부가 있는 전남도청은 계엄군에게 완전 포위되었다. 열흘 동안 광주에서 펼쳐졌던 민중들의 봉기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10.26 이후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민주화를 향한 푸른 꿈과 열망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부셔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더 이상 광주에 머물 수가 없었다. 계엄군의 삼엄한 경비와 가택 수색, 검문 검색 등이 강화되면서 광주는 또다시 무서운 공포의 도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27일 오전, 짐을 싸고 철수에 나섰다. 그러나 박충 기자는 며칠 더 광주에 남아 27일 새벽 계엄군의 진압 과정과 시민군과의 대치 장면, 도청 최후의 모습 등을 동영상에 담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망월동 묘역에 안치된 사진을 보는 어린이
1980년 5월 29일, 상복을 입은 한 어린이가 망월동 묘역에 안치된 형의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진은 나경택 기자가 쵤영.

광주 취재 기자 대부분 강제 해직돼

그는 전남도청 인근 갑을여관에서 4박5일을 묵으며 계엄군에 의해 장악된 광주의 순간들을 필름에 담느라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박 기자는 그보다 먼저 광주에 와 있던 조순용(김대중 정부 청와대 정무 수석), 김창훈(촬영, 현 JTBC 근무) 기자와 임무 교대를 하고 계속 머물렀다.

철수에 나선 취재팀 일행은 장성-고창-정읍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서소문 중앙매스컴 빌딩 5층 보도국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무표정했다. 아니 싸늘하기까지 했다. 빈 말일지라도 그동안 고생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국장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를 하려 했더니 얼른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것이었다.

지난 주말 부장에게 거짓말로 광주 외할머니 문병을 다녀오겠다던 초년생 기자가 공식 취재팀과 함께 이제야 나타났으니 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만약 근무지 이탈, 명령 불복종 등 항목을 적용해 필자를 징계해도 사실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그 후에도 현지를 다녀온 우리에게 그곳의 실상을 물어보는 동료 기자는 거의 없었다.

뜨거운 5월이 가고 6월이 다가왔다. 당시 언론계는 검열 및 제작 거부 운동 등으로 불타올랐던 5월의 전의(戰意)는 사라지고 출처 불명의 괴소문과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있었다. 조만간 각 언론사별로 자체 언론 정화 작업이 시작될 것이라거나 각 사별 해직 예상자가 몇 명쯤 될 것이라는 둥 흉흉한 소문들이 난무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8월의 언론인 강제 해직과 연말의 언론 통폐합을 앞두고 신군부가 의도적으로 전개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이를 통해 기자들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그들끼리의 연대(連帶)나 결속(結束)을 미연에 저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마침내 7월이 다 지날 무렵 끈질기게 나돌던 해직 사태가 현실로 나타났다. 수백 명의 강제 해직자 가운데 상당수는 광주 현지를 다녀온 기자들로 채워졌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필자는 그때 광주를 다녀온 뒤 평소 못 마시던 소주를 매일 밤 몇 잔씩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눈을 감으면 광주 상무관에서 보았던 처참한 장면들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소주를 반병쯤 마시면 적당히 취기가 올라 잠을 자기가 수월해졌다.

그런 습관은 그 후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시에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광주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끝>

2016년 상무관 모습
2016년 5월 17일 광주를 다시 찾은 필자. 5월 항쟁 당시 도청 앞에 있던 상무관이 지금도 그 자리에 보존돼 있었다. ⓒ김준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