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보적인 존재감, 배우 백윤식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독보적인 존재감, 배우 백윤식

2016.05.30 · HEYDAY 작성

백윤식,배우,영화배우

개성 있는, 연기력이 뛰어난, 존재감 있는… 배우에 대한 수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보적’이라는 표현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다. 백윤식은 그런 배우다. 또래 배우들이 ‘자애로운 아버지’나 ‘위선적인 회장님’을 연기하며 ‘정형성’을 띨 때, 그는 부패한 신문사 주필이나 전설의 타짜, 싸움의 고수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리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갔다. 그래서일까 황정민, 김윤석 같은 후배들은 그의 족적을 헤아리며 ‘나이 듦’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한계를 떨쳐버린다. 좋은 배우 앞에 나이와 세월은 곧 품격이요 연륜이라는 것을, 매 작품마다 증명해 내고 있는 백윤식. 그를 만났다.


 

소식을 들었어요. 6월 초 열릴 제5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후보로 올랐다고요. 중년 배우로는 유일하게 이병헌, 송강호, 유아인, 황정민 씨와 경쟁하게 됐는데 소감이 어때요?

제가 직업적으로나 인생 경험으로나 우리 후배들보다는 연륜이 좀 있죠(웃음). 농담이고,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수상 여부를 떠나서 그런 영화제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다는 게 좋더라고요. 영화 한 편을 만들려면 배우는 물론이고 여러 스태프의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데, 그런 노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이니 얼마나 뜻깊어요.

 

그러고 보면 한 번도 젊은 배우에 비해 ‘묻힌다’ 혹은 ‘서포트해준다’는 느낌을 준 적이 없어요. 늘 ‘저 역할을 저렇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돋보이고 세련됐죠. 그래서인지 배우 황정민은 “백윤식 선배님 같은 분들이 길을 잘 닦고 있어 나이에 국한되지 않고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도 했어요. 대체 그 비결이 뭐예요?

감독들이 나한테 독특한 캐릭터를 맡겨놓고 마음껏 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기 때문이겠죠. 저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전작과 다른 연기를 할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배우들은 비슷비슷해 보일 수 있는 연기를 제일 경계하는데 저 역시 그게 평생의 숙제예요. 오늘은 물, 내일은 콜라, 모레는 아이스크림으로 변해야 대중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대사를 그대로 외우되, 어떤 느낌으로 연기할지를 많이 생각해요. 대본을 읽고 또 읽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 한편, 대사를 이런 톤으로 처리해야겠다 싶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따로 적어놓기도 하죠. 이런 여러 조건들이 맞물려 독특한 위치를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한 이후 청룡영화상 남우 조연상 등을 휩쓸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작품이 연기 생활에 큰 전환점이 됐나요?

그 말엔 좀 어폐가 있어요. 나는 연극 무대로 출발해 KBS 공채 탤런트로 TV 연기를 시작한 케이스인데 운이 좋아서 그랬는지 초반부터 주연을 많이 맡았어요. 그래서 작품성 있는 작품에도 많이 출연했고 그 점에 나름 긍지를 가지고 연기를 했는데, 마치 영화 한 편으로 오랜 조연 생활에서 벗어나 떴다는 식의 기사가 쏟아지니 불편하더라고요. 물론 그 작품으로드라마에서 영화로 주 활동 영역이 달라진 건 맞지만, TV 연기를 꾸준히 해온 덕분에 영화 쪽 일로도 연결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백윤식,배우,영화배우

어떤 계기로 연기자가 될 결심을 했어요?

학창 시절엔 음악, 영화 외에 딱히 즐길 거리가 별로 없잖아요? 친구들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한 번씩 빠져 사는 것처럼 저도 그랬죠. 다만 그게 취미 생활에서 끝나느냐 업이 되느냐가 달랐어요. 다른 친구들이 다 일반대학에 진학했는데 저는 뭐랄까 벤처 정신 같은 게 좀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끼가 풍부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두 아들 모두 연기자가 됐는데 아버지로서 어떤 입장이었나요?

나는 두 친구 모두 이쪽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안했어요. 어릴 때부터 접해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연기를 하겠다고 하는데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어떤 의미에서 연기는 노력해도 답이 안 나오는 직업이니까. 능력만큼 대우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거든요. 그래서 ‘난 너희들이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돌려서 말한 적도 있는데, 나도 그랬지만 자식은 부모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더라고요(웃음).

 

며느리 정시아 씨가 방송에서 곧잘 시아버지의 자상함에 대해 얘기하곤 해요. 3대가 함께 살고 있는데 불편한 점은 없나요?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관계가 마냥 편하진 않다고들 하지만 난 그런 거 잘 모르겠더라고요. 너는 며느리, 나는 시아버지라고 관계를 의식하며 살지 않고 그저 서로 다른 인격체로 생각하니 좀 편해요. 기본적으로 며느리가 워낙 싹싹하고 붙임성이 좋아요. 내가 입맛이 좋아서 뭘 만들어주든 맛있게 잘 먹는 것도 있고요. 잔소리 같은 거 일절 안 하고(웃음).

 

술 한잔한 날이면 ‘내 재산은 모두 준우(손자) 거다’라는 우스갯소리를 자주 한다고 들었어요. 그만큼 손자가 예쁘다는 의미겠죠?

그렇죠. 자식은 예쁘면서도 이걸 어떻게 키우나 책임감이나 중압감이 들잖아요. 그런데 손주는 이유, 조건을 불문하고 맹목적인 애정을 쏟게 돼요. 처음 아들 내외가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손자가 태어나니까 세상에서 처음 느껴보는 충만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손자가 올해 여덟 살인데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녀석이 이젠 전기 아깝다고 방 안 불을 끄고 다닐 정도로 커버렸어요. 내가 전기 아끼라고 자꾸 콘센트며 전기 스위치를 끄고 다녔더니 저도 배운 모양이죠? 제 엄마가 TV 켜놓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막 혼내더라고(웃음). 얼마나 귀여워요. 제 오빠보다 세 살 더 어린 손녀딸 서우도 참 예쁘고요. 세상을 다 줘도 아까울 게 없는 존재가 바로 손주 같아요.

 배우,영화배우,백윤식

배우로서 외모 관리에도 소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물론 중요하지만, 인위적으로 얼굴을 건드리는 건 영 싫더라고요. 보기 좋은 얼굴이라는 건 주름이나 검버섯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나이 들면 늙는 게 당연하지만, 그 얼굴에 지성미와 건강미를 겸비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아름답죠. 그게 관객들 입장에서 보기에도 자연스러울 것 같고요.

 
오늘 입고 온 청바지나 셔츠도 굉장히 감각적인데 직접 고른 건가요?

골랐다기보다는 그냥 주워 입고 나왔죠. 도빈(큰아들)이가 내 사이즈를 잘 아니까 옷은 물론이고 양말, 신발, 액세서리 할 것 없이 다 사다 줘요. 애가 감각이 좋아서 다 괜찮은 것을 골라 오더라고. 아들들이랑 옷 같은 거 공유하냐고? 난 그런 거 없어. 내 건 내 거야(웃음).

 

또래들은 지금 노후 자금이나 은퇴 후 여가 생활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데 혹시 나이가 들면서 생긴 고민 같은 게 있나요?

내 직업에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자유분방하게 살아와서 그런지 정년이니 은퇴니 하는 문제들을 실감하며 살진 못해요. 그저 뉴스를 보며 노년에 저런 문제를 겪을 수 있겠구나 공감할 뿐이죠. 하지만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인간인 이상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잖아요. 물론 나도 그런 걸 느낄 때가 있고요. 요즘은 다른 것보다 건강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 내 나이가 벌써 7학년(70세)이란 사실이 놀라워요(웃음). 심장이 70년간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뛰어온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일이죠. 언젠간 나도 죽음을 맞이할 테지만 자손들 고생시키지 않고 조용히 잠자듯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어요. 얼마 전 지인의 조모가 98세에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당신에게도, 자식에게도 그게 참 좋겠더라고요. 물론 누구나 바라는 마지막 모습이겠지만요.

 

반대로 내가 아직도 젊구나를 느끼는 순간은 언제예요?

늘, 항상(웃음).

 

끝으로 누군가 백윤식에게 전성기의 의미를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거예요?

통속적으로 전성기를 따지자면 화려하게 잘나가는 상황, 즉 좋을 때만 떠올릴 거 아니에요. 그런데 마음먹기에 따라서 최악의 상황도 좋을 때가 될 수 있어요. 왜냐면 상황은 급변하니까. 나쁜 상황에서도 좋은 기회가 금방 또 오거든요. 그런데 그걸 알아보고 기회를 잡아 전성기를 만들려면 기본적으로 자기 실력이 있어야 되더라고요. 그러려면 매일 나태해지려는 자기와 싸워야 하겠죠. 원래 자기와의 싸움이 제일 힘든 거니까. 자기를 극복하면 날마다 전성기예요.

 

기획 이인철 화보 진행 서희라 인터뷰 장혜정 사진 목나정 헤어와 메이크업 스타일플로어 패션 스타일링 김선미

※ 이 기사는 <헤이데이> 25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