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의 상징시 ‘아아, 광주여!’는 어떻게 탄생했나?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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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상징시 ‘아아, 광주여!’는 어떻게 탄생했나?

1시간 만에 써 내려간 108행의 시

5.18 상징시가 된 ‘아아, 광주여!’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다음은 5.18기념재단이 발행한 언론인들의 증언록 <5.18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2014. 8. 발행, 비매품) 가운데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의 활동을 정리한 손정연, 박화강 두 기자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1980년 5월 당시 전남고 교사였던 김준태 시인은 증언록 <5.18민주화운동과 언론투쟁>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6월 2일(월) 오전 9시경 문순태 선배(당시 전남매일 편집부국장)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광주항쟁 관련 시를 쓸 수 있느냐며 “마감시간이 촉박하니 시를 빨리 써 오라”고 했다. 아니 1시간도 안 남았는데. 분명 무리한 청탁이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시를 쓰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곧바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집밖으로 나가 있어 달라고 했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가자마자 배를 깔고 시를 써내려 갔다. 1시간이 안 걸려서 108행에 달하는 시가 완성됐다. 나 자신도 놀랄 일이었다. 어떻게 써내려 갔는지 모르게 시를 완성했다. 울부짖는 나의 마음 가는대로 써내려 간 것이다.

나의 당시 심정상태는 정신이 여전히 반쯤 나간 상태였다. 항쟁 기간, 두 가지 사건이 나를 정신적으로 큰 충격 속에 빠뜨렸다. 하나는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 당시 가톨릭 센터 앞. 시위대와 함께 있던 내 눈 앞에서 15명 정도가 총에 맞아 꺼꾸러지는 것을 보았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나였지만 가슴에 정통으로 총을 맞아 피가 솟구치는 시민을 붙안고 다급한 나머지 인근 송산부인과로 뛰던 당시 상황은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몇 시간 후 전남고등학교 동료 교사로부터 역시 동료 교사인 김00 선생의 부인이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전남대 정문 앞 인근에 살면서 임신 8개월째인 몸으로 남편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중, 이날 정오 무렵 머리 관통상으로 비명에 간 최미애 씨.

저녁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 남편 김 교사는 “내 처, 머리가 없다”며 실신상태로 울고 있었다. 장모로부터 숨진 딸을 집으로 데려올 때까지 뱃속 태아가 깊은 숨을 쉬듯 불쑥불쑥 뛰어 태아라도 살리고자 여러 군데 병원으로 연락했으나 가망이 없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충격이 내재된, 상처받은 나의 마음 속 또 다른 내가 시를 써내려 간 것이었다. 평소라면 도저히 그런 짧은 시간 쓸 수도 없는 장시였다. 시 원고를 직접 들고 신문사로 찾아갔다. 문순태 부국장에게 넘긴 후 한 시간 반 가까이 편집국 앞 계단 층계에서 기다렸다. 이날 신문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마침 도청 검열관실을 다녀오던 어느 간부가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했다. 내 시를 읽어 본 검열관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예봉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 나는 그 길로 집에 가지 않고 연고가 없는 곳으로 23일간이나 잠행했다.

그러다 6월 25일 아이들이 보고 싶어 먼저 학교에 들러 그동안 사정을 얘기한 후 집으로 간 지 5분 만에 붙잡혔다. 서부경찰서로 간다고 했으나 화정동 505보안대로 끌려가 기본적인 매를 맞았다. 다행히 심한 고문은 당하지 않은 채 20일간 조사를 받은 다음 교사직 사표를 쓰고 나왔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휘날리는 태극기의 모습.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적어 간 광주민주화운동 상징시 ‘아아, 광주여’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108행의 시에 잘 표현하고 있다. 사진은 당시 전남일보 나경택 기자가 촬영. ⓒ김준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아, 광주여!’

108행에 이르는 장문의 이 시는 그러나 당시 검열과정에서 3분의 2가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 나머지의 절반마저도 빨간 연필로 ‘보류’ 표시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편집 간부들은 그 보류 부분을 무시하고 그냥 게재키로 했다. 제목은 ‘우리나라 십자가여!’를 쓰지 못하게 해 ‘아아, 광주여!’로 바뀌었다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무등산 자락 광주시 전경 사진 아래 편집된 ‘아아, 광주여!’는 비록 3분의 2가 잘려나갔음에도 발행되자마자 시민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기자들은 당시를 회고했다. 다음은 1980년 6월 2일 김준태 시인이 1시간 만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써내려 간 108행의 광주 기록 전문이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1.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 입을 벌린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히 조각나 버렸나

하나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서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서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2.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인간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처럼 뒤집어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의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 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버렸나

 

3.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산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지금 우리들은 다만

쓰러지고 쓰러지고 울어야만 하는가

공포와 몸숨김으로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가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 밖에 나아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아니, 당신의 신부를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리는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 해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러나 나는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는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4.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는 몇 백번 죽고도

몇 백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불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뼈와 뼈만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저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 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