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의 멘토, ‘역효도’를 권하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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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의 멘토, ‘역효도’를 권하다

2015.07.28 · HEYDAY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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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을 출가시킨 뒤 적적한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한 쉰 살의 고광애 씨. 어느덧 여든이 가까워진 그녀는 관련 책을 다섯 권이나 낸 ‘노인 전문가’가 됐다. 영화 <처녀들의 저녁 식사> <바람난 가족> <하녀> 등을 탄생시킨 임상수 감독의 어머니로도 유명하지만, 그동안 TV, 라디오 등 매체를 가리지 않고 ‘노인 이야기’에 목소리를 내온 그녀는 독자적으로도 충분히 조명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특히 기성세대의 ‘꼰대적인 면’을 지적하며 보다 쿨한, 보다 심플한 할매, 할배가 될 것을 끊임없이 설파한 점은 신선함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최근 <나이 드는 데도 예의가 필요하다>는 다분히 ‘고광애스러운’ 책을 펴낸 그녀를 만났다.

 


 

책에서 ‘역효도’를 제안하신 점이 참 신선했어요.
자식이 부모에게 잘 하는 걸 ‘효도’라고 하는데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잘 하는 걸 ‘역효도’라고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결국 자식들에게 걱정 덜 끼치고, 부모 봉양 시기를 줄여주자는 취지죠. 100세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식들이 부모 속 썩여가며 자라온 세월보다 부모가 다 늙어서 건강, 경제, 부양 등으로 자식들 허리 휘게 하는 세월이 훨씬 더 길어졌잖아요. 이건 형평성 면에서도 어긋나는 일이에요. 자식들의 눈에 점점 퇴화해가는 부모님의 부정적인 면이 들어오기도 할 거고요. 그러니 스스로 몸 건강, 마음 건강을 유지해서 자식들에게 걱정 끼치지 않는 역효도를 하면 어떨까요.

 

‘효도 총량의 법칙’도 세우셨죠?
저희 아버지가 70세에 돌아가셨는데 제가 가진 효심의 총량을 다 쓰지 못했기 때문인지 주체하지 못할 슬픔을 느꼈어요. 그런데 유독 사이가 각별했던 어머니가 93세에 돌아가시자 의외로 담담하더라고요. 자식으로서 해드릴 수 있는 효도를 다했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효심에도 총량이 있다는 점을 깨닫고 보니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있는, 쉰이 넘은 딸에게 더 이상 효도를 바라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을 저는 가장 싫어해요. 말인즉 더 큰 효도를 받고 싶다는 욕심 아니겠어요. 장수 시대의 비극일 수 있지만, 자식들의 효심 총량이 길어진 목숨만큼 늘어나진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나이가 들면 소위 ‘꼰대’가 되기 쉬운데 이를 경계할 방법은 없을까요?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는 노년이 되면 가장 먼저 마음을 바꿔 먹는 것, 즉 ‘회심’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살지 말고 삶을 전방위적으로 바꿔보란 이야기죠. 기존의 세속적인 것, 타산적인 것에서 좀 벗어나란 의미인데 그 첫 번째 방법이 바로 명령권자의 위치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지시하고 충고하던 타성을 완전히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부모로서의 권위도 발휘해서는 안 되죠. 그러나 실망할 건 없어요. 노인으로서 정서적인 권위를 꼭 지키고 있으면 저들이 아쉬워서 먼저 찾아오는 때가 생긴답니다. 그때 우리 노년들이 마치 아까운 것을 꺼내 보이듯 상담해주면 되겠죠. 충고란 강매해서는 안 되고, 존경심이란 갈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늙어감’을 우울, 쇠락, 쓸모없음 등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요.
늙음의 장점이 많아요. 젊은 시절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줬고 더불어 성숙해지기까지 했죠. 아주 나이 든 늙은이를 빼고는 젊은 저들보다 더 깊고 더 넓은 사고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럼에도 쓸쓸함을 느끼는 날이 올 테니 풍부한 노후 자금보다 마음의 밑바닥을 다져놓는 편이 더 좋겠어요. 나는 노후 준비 1순위가 ‘홀로서기’라고 보는데 나이가 들면 노부부끼리 또는 혼자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기잖아요. 고독이 겁나 아들 손주 며느리 속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그 속에서 또 다른 하위 고독을 맛볼 수 있어요. 그러니 늙음을 거부하지 말고, 늙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며 고독을 이겨내는 방법을 익혀야 해요. 제 주변에도 스마트폰이든 인터넷이든 도통 배울 생각이 없는 친구들이 있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다는 이유로 독야청청 살다 보니 점점 더 고립되고 외로워지는 게 아닐까요?

 

‘죽음’에 관해 오랫동안 공부해오셨다고 들었어요.
‘메멘토 모리 독서회’에서 24년 이상 활동했어요. 한 달에 한 번 죽음에 관한 책을 읽고,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는 모임인데 어떻게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준비해야 하는지 다양한 관점의 책들을 통해 공부했어요. 사실 우리나라는 ‘죽음’ 자체를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데스 위크(Death Week)’라고 해서 한 주 동안 모든 시민들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든요. 마냥 피하고 볼 게 아니라 죽음의 의미를 곱씹고, 스스로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아름다운 끝’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사전연명치료 의향서’를 작성했어요. 이는 죽음에 임박했을 때 제공될지 모르는 일체의 의료 행위에 대해 미리 의향을 밝혀두는 절차죠. 지난 4월 세상을 떠난 남편 역시 월요일에 수술해서 일요일에 돌아가셨는데 미리 사전연명치료 의향서를 작성해서 갈등 없이 기도 삽입을 거부할 수 있었어요. 임종 하루 전날까지도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며 마지막을 정리했으니 괴로워하지 않는, 좋은 끝을 보여줬죠. 살면서 섭섭한 적이 없진 않았지만 끝이 좋으니 남편에 대한 모든 게 좋게 느껴지더군요. 어떤 마무리를 짓고 떠날 것인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해요.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하려면 말이죠.

 

기획 장혜정 사진 박충열(스튜디오 텐) 어시스턴트 엄예지
※ 이 기사는 <헤이데이> 8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