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사람들] 피아노맨의 탄생, 빌리 조엘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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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사람들] 피아노맨의 탄생, 빌리 조엘

미국 최고 싱어송라이터, 피아노 맨, 빌리 조엘.

6번의 그래미 수상, 23번의 그래미상 후보 지명,

미국 1970~1990년간 ‘톱 40’ 하트 노래 중 33개 곡 랭크

모두 자신이 작곡, 1억5000만 장 음반 판매량 보유.

빌리 조엘이 올린 기록들이다. 음악계에서 뉴욕을 빛낸 스타라고 한다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어릴 적 역경을 거쳤고, 열등감이 심했으며 때로는 불운에 못 이겨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이다.

 

피아노 치는 아이와 아빠.
빌리 조엘은 클래식 피아니스트 아버지 밑에서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자랐다. ⓒGANNA MARTYSHEVA/Shutterstock

 

어릴 때부터 탄탄한 피아노 공부

그는 1949년 뉴욕 브롱스에서 태어난 이후 바로 강 건너 롱 아일랜드 힉스빌이란 동네로 이사 간다.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 독일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모두 유대인 집안이다.

아버지 직업이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다. 이 점이 그의 인생을 크게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어린 그도 자연스럽게 피아노와 친해진다. 나아가 4살부터 동네 학원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 그냥 쳐보는 차원이 아니다. 귀가하면 부모님들이 지도해준다. 그렇게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탄탄하게 피아노를 정복해 들어간다.

그런 기초실력이 결국 그를 평생 지배가 될 줄은 당시에는 몰랐다. 어떤 날은 손목이 아플 정도로 연습을 한다. 억지로 시킨다고 그렇게 되질 않는다. 어린 자신도 이미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10살도 되기 전에 피아노에 대단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때론 재즈풍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면 아버지한테 혼날 정도였다. ‘그게 무슨 음악이냐고’ 피아노를 정통으로 배운 셈이다.

작곡에 있어서 음의 원천은 피아노다. 다른 악기보다도 다양한 음과 폭을 갖고 있기에 곡을 작성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한결같이 피아노에 능수능란하다. 그렇게 어릴 적부터 그의 이름은 피아노맨이 된 것이다.

 

옆길로 빠진 길이 자신의 길이 되다

빌리 조엘은 세 차례에 걸쳐 199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그리고 2006년 롱 아일랜드 뮤직 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다. 2001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서 조니 머서 어워드를 받았고, 2013년에는 케네디 센터 명예 훈장을 받았다.

전당이란 전당에는 수없이 들어갔고, 훈장이란 훈장 또한 누구에 뒤지지 않게 받아냈다.

피아노 치는 빌리 조엘.
빌리 조엘은 음악으로 전당이라는 전당, 상이란 상은 다 받은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이다. ⓒJStone/Shutterstock

중학교 댄스파티에 우연히 무대에 올라 엘비스 노래로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음악에 몰입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뽑으라면, 역시 그의 어린 시절의 힘든 고난의 과정이었다.

또래 남녀학생들로부터 잘한다 소리에 어깨가 우쭐해서 시작한 노래와 자신감으로 14세 때부터 록 밴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학교 행사나 인근 이벤트에 음악행사에 참여하면서 공부는 뒷전이고 옆길로 빠진 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는 결국 고등학교 졸업은 못한다. 소위 중졸이다. 물론 나중에 명예 고등학교 졸업장은 받았지만.

1971년부터는 솔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어렵게 만든 정식 앨범 발표도 한다. 그러나 인기를 못 끌자 실망한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어두운 시간은 10년이 흘러야 환해진다.

더구나 자신은 키도 작고, 외모도 그렇게 특징이 없는 데다가 약간 흑인 혼혈의 피가 섞였다는 DNA에 열등감마저 점점 커진다. 그런 과정에 참다못해 집에서 음독자살까지 시도한다. 다행히 살아났다. 자살하기 위해 집 지하실에 있는 가구 세척제를 마신 것이다. 나중에 옆에 표백제도 있었는데 왜 하필 가구 광택제를 마셨냐는 질문에 그는 ‘가구 광택제가 마시기 수월한 것 같아서’라고 나중에 밝혀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결국 그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음악이었고 피아노였다. 성년의 나이에 부모에게 지원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결국 술집 피아노 가수였다.

궁핍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밥벌이 차원에서 술집이나 바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지낸다. 그 당시 자주 불렀던 노래가 바로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피아노 맨’이다.

피아노를 치면서 늦은 밤의 술 집 고객들에게 눈물의 곡들을 불러준다. 이탈리아 출신이 들어오면 ‘대부’의 노래를, 아일랜드 사람들이 술집에 들어오면 ‘대니 보이’를 불러준다. 세상풍파에 지친 단골 고객에게 끈적거리는 재즈풍의 노래로 향수의 분위기를 진하게 드리워준다. 그러면 그의 피아노 옆 돈 통에 돈들이 수북이 쌓인다. 그렇게 인기와 소문이 점차 퍼져나간다.

그의 혼이 담긴 노래와 아픔과 한을. 고객들은 금세 알아차린다. 생활을 위해 노래를 부르지만 결국 그 자신의 지나온 과정을 노래 속에 담겨 나오는 가락들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알려진 그의 노래와 실력은 1973년 싱글 정식 앨범을 내는 기회가 온다. 그게 ‘Piano Man’이고 바로 빌보드 상위에 랭크된다. 그 이후 그의 노래는 꾸준히 전파를 탄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둔다.

 

역경을 견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가 성공하는 주요한 원인은 당연히 그의 자작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인생에서 맛본 쓴 맛을 자기 속 마음으로 부터 끄집어 낸 점에서 여타 가수들보다 비교할 수 없는 차이점이다. 하나의 노래에 대한 완전한 곡 해석과 완벽한 감정표현이 팬들에게 자연스럽게 읽히게 된 점에 있다.

빌리 조엘은 전 세계적으로 1억 50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미국에서 6번째로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가수이다.

대략적인 통계로 보면, 엘비스, 비틀스, 아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제이지 등이 그와 비슷하거나 앞서거니 최대 음반 통계치를 갖고 있는 셈이다. 1억 장에서 2억 장 사이에서 말이다.

빌리 조엘은 1993년 발매한 ‘River of Dreams’를 끝으로 음악 작업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지만 그는 계속해서 순회 콘서트에 참여, 많은 솔로 곡들을 부르며 왕성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는 독실한 유대인 집안이지만 그는 유대교를 충실하게 따르지 않았다. 학교공부도 싫어서 음악한 사람이니 엄격한 유대교 교리를 따랐을까. 자기 말대로 그는 정통 유대인인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다. 그래도 그의 피에는 수천 년 유대인의 지혜가 녹아있는 유전자를 받았기에 그런 총명함과 영특함이 피아노를 통해서 들리는 것 같다.

피아노 치는 사람.
힘든 시기에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역경을 이겨내고 피아노맨으로 성공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실패에 무릎꿇지 않고 버티는 게 중요하다. ⓒisaxar/Shutterstock

그는 정통 유대인은 아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완벽한 유대인의 파워와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집은 자신의 고향 뉴욕 이스트강 건너인 롱아일랜드 힉스빌에서 10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서 가까운 곳, 대서양의 조망이 뛰어난 바다 가운데 섬에서 살고 있다.

인생의 과정 중에 역경과 고통을 잘 버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를 통해 배우게 된다. 나아가 어릴 적 배움과 노력 또한 전체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는 쉽고도 간단한 진리를 또 한 번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