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일의 은퇴학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보기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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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일의 은퇴학교]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보기

2017.04.11 · HEYDAY 작성

은퇴는 누구나 겪는 인생의 과정이지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준비할지는 개인마다 다릅니다. 철저한 대비와 계획을 세워놓은 경우도 있지만, 막막한 심정으로 떠밀리듯 은퇴를 맞는 경우도 있죠. 이에 <헤이데이>는 한국샌더스은퇴학교 조관일 교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그 역시 은퇴에 얽힌 복잡다단한 감정을 겪은 뒤 현재 은퇴자를 위한 교육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암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위축성위염이라는 판정을 받았을 때 의사가 툭 던진 말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음력 설날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는데 차도가 없었다. 처음엔 그저 약간의 과음과 과식을 한 탓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위통과 복부의 불쾌감은 병원을 세 군데나 바꾸어가며 약을 먹었지만 낫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거 심상치 않은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슬슬 걱정이 엄습해왔다. 그러고는 날이 갈수록 상상력이 활기를 띠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허리를 삐끗했다. 줄기차게 앉아서 글을 쓰다 보니 종종 그런 일이 벌어지던 터였다. 갑자기 속 쓰리고 거동 불편한 노인이 된 듯해 비감한 심정이었다. 일단 병원에 건강검진을 신청했다. 허리 아픈 것이야 아는 병이니 그렇다 쳐도 배가 아픈 것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시경검사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나의 상상력은 극한을 향해 달렸다. 매우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이었다. ‘위암으로 판정이 나면 어떡하지?’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맥이 쭉 빠진다. 자료상 위암의 5년 생존율이 75%를 넘는다지만 그건 위로가 되지 못했다.

당장 빼곡하게 찬 강의 스케줄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부터 투병에서 오는 후유증 등 별별 걱정을 다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내색하지 않고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강의 요청이 들어왔지만 수용하지 않았고, 집필하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 속도를 더했다. 아직은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슬펐다. 노후란 결국 이렇게 오는 건가 싶었다. 원고를 쓸 때마다 종종 즐기던 ‘혼술’이 후회스러웠다. “술을 안 마시고 10년을 더 사느니 술을 마시고 10년을 일찍 죽는 게 낫다”고 했던 젊은 날의 입방정이 께름칙했다. 대작을 내는 것도 아니면서 책을 쓴답시고 운동을 게을리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천하를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는 그 흔한 경고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조상님께도 빌었고 하느님께도 빌었다. ‘한 번만 도와주십사’라고. 인간의 나약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검진 날, 나는 수면을 취하지 않고 생생한 정신으로 내시경검사를 받았다. 의료진이 주고받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 검진이 끝나고 주치의의 설명을 듣기 위해 진료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나를 내려다봤다. 병색이 완연한 겁먹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스스로가 초라했다.

드디어 주치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치 태도가 공손하면 검진 결과가 좋게 나오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컴퓨터 화면을 힐끗 훑어본 의사가 무심히 말한다. “약간의 위염 증세가 있네요. 한 달 정도 약을 드세요.”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아니 신천지가 전개되는 것 같았다. 인생이 활력 있게 다가왔다. 아, 이 간사한 나약함이여~! 그러나 지난 50여 일간의 충격(?)을 큰 교훈으로 삼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페이스북에 단호하게 글을 올렸다. ‘지난 40년간 이어온 책 쓰기를 이제는 그만하겠다’고 말이다. 이건 앞으로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렇게 결단의 첫발을 내디뎠다.노후를 맞으면서 때로는 상상으로나마 최악의 상황을 직면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결연한 각오로 연결되어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기획 장혜정 조관일(한국샌더스은퇴학교장) 사진 셔터스톡

*이 기사는 헤이데이 4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