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의 세상만사] 꽃동산에서 술 향기와 바꾼 이성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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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득의 세상만사] 꽃동산에서 술 향기와 바꾼 이성

“여보시오,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십시다. 풀 밟기는 오늘 하고 목욕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캐고 저녁에는 낚시질 하세.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 따뜻한 바람이 문득 불어 푸른 물을 건너오니, 맑은 향기는 잔에 지고, 떨어지는 꽃잎은 옷에 진다…”

 

 

조선 초기 가사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정극인의 작품 상춘곡(賞春曲)에 나오는 여러 구절 중 하나입니다. 옛날 원문과 달리 현대식 어법에 맞게 옮겨진 것입니다만 지금의 중년 세대에게 상춘곡은 국어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제였습니다. 작품을 쓴 사람의 이름을 묻던, 아니면 정극인의 작품 이름을 묻는 식으로 말이지요. 한자 뜻 그대로라면 ‘상춘’은 봄의 경치를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600년 이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그 시대에도 상춘을 노래한 작품이 나왔을 정도면 흐드러지게 핀 꽃이 온천지를 곱게 물들이는 봄이야 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이어지게 만드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정이 메마르고 팍팍한 삶에 지친 이들이라 할지라도 봄 앞에서는 다시 용기와 희망을 얻고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을 터이니 상춘은 누구나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올해 역시 개나리에 이어 벚나무가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이달 초부터 전국의 벚꽃 명소는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꽃소식이 반갑기도 하려니와 가는 봄, 지는 꽃이 아쉬워 한 번이라도 더 고운 모습을 눈에 담아 두려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을 걷다가 만개한 꽃을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튀어 나오고 바람을 타고 흩뿌려지는 꽃비를 맞기라도 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살아 있음, 그리고 건강한 눈으로 이렇게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크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꽃구경은 누구나 평등하게 누리는 작은 행복

 

해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신문과 방송이 전하는 꽃 나들이 뉴스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전국 각지의 명소에 발 딛을 틈도 없이 많은 인파가 몰렸다는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봄을 즐긴 사람들, 즉 상춘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명소들이 몸살을 앓고 무질서와 무례가 극성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과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한 TV가 비춰준 서울 여의도의 최근 벚꽃축제 뉴스에서는 여기저기서 벌어진 술판과 도로를 가득 메운 노점상, 그리고 차량과 인파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치킨, 피자배달 오토바이 모습이 화면을 가득채웠습니다. 꽃 구경을 나온건지 술 파티에 나온건지 구별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한 일간지가 전한 소식은 한 술 더 떴습니다. 국립현충원을 찾은 상춘객들에 관한 뉴스였습니다. 이 신문은 꽃 구경차 현충원에 들린 나들이객들이 아무 곳에서나 눕고,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일을 다반사로 해 단속원들이 골머리를 앓는다고 전했습니다. 과도한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거나 술판을 벌이는 이들까지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습니다. ‘봄 경치를 즐기고 감상 한다’는 명분 아래 벌어지는 일이라지만 호국영령과 순국선열의 혼을 모신 현충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태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화를 가라앉히기 힘들 수준입니다.

 

상춘곡에서도 일찌감치 “막 익은 술을 두건으로 걸러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수 놓고 먹으리라”고 표현했듯 술과 꽃은 오래 전부터 잘 어울리는 환상의 콤비입니다. 술을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바다건, 산이건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는 술이 한층 더 맛나고 술술 들어가는 것을 거의 누구나 경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물며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봄꽃이 만개한 곳에서 흠뻑 취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큰 행복도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술 향기에 이성과 예절을 내맡긴다면

 

하지만 꽃 축제가 열리는 명소와 현충원은 분명 경우가 다릅니다. 특정 개인에게만 한정된 사적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공중 예절을 지켜야 하는 열린 장소입니다. 옷매무새도 조심스러워야 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해쳐서는 안 되는 현충원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입장객 모두에게 요구되는 자세와 예절이 여타 장소보다 훨씬 더 엄격해야 맞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봄을 즐긴다는 명분으로 술 향기에 자신의 이성을 내맡기며 예절을 팽개치고 상식과 질서를 짓밟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것은 물론 갈수록 도를 더해 가는 우리들 스스로의 상식파괴 행위가 안타깝고 개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술을 마시고 싶다면 꽃구경을 실컷 하고 난 후 다른 장소에서 마시면 됩니다. 꽃과 술을 꼭 연결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 앞에서는 꽃이 주는 축복에 흠뻑 젖기만 해도 됩니다. 거듭되는 술잔에 기억이 몽롱해지고 눈은 흐려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혹독한 추위를 참아내며 한 겨울을 견디고, 단 며칠간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꽃들에게 우리가 취할 태도는 바른 자세와 여유 넘치는 꽃구경일 뿐, 술 향기에 취해 무너진 모습은 아닙니다.

 

 

‘내년’의 꽃들이 알고 있을지 모를 우리의 ‘오늘’

 

봄은 내년 이맘때도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고, 오늘 피었다 내일 진 꽃들도 역시 다시 아름다운 자태로 우리 곁에 다가올 것입니다. 꽃들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겉모습도 올해의 꽃과 내년 꽃이 구별이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꽃들은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술에 취한 우리가 팽개친 공중도덕과 예절, 그리고 산을 이룬 축제장의 쓰레기더미를 말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시험할지 모릅니다. 얼마나 달라졌는지, 얼마나 시민의식이 성숙해졌는지, 봄의 축복을 제대로 누릴 준비가 돼 있는지를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한 마디만 덧붙이면서 저도 빨리 말문을 닫을까 합니다.

 

“꽃 향기에 취하실건가요, 아님 술 향기에 취하실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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