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세상만사] ‘남편의 거울, 아내의 거울’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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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득 세상만사] ‘남편의 거울, 아내의 거울’

“당신이 내 거울이고, 내가 당신 거울이야.”

 

4월 초 막을 내린 TV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흘러나온 대사입니다. 이 드라마는 나이 60을 한참 넘긴 초로의 부부와 아들, 딸 등을 등장인물로 내세운 주말 연속극이었습니다만 드라마에 별 관심이 없던 제게 대사 한 마디로 아주 강한 인상을 남겨 놓았습니다. 대사는 초등학교 여자 동창의 꾐에 빠져 잠시 헛된 꿈을 꾸었던 남편이 거액의 돈을 사기당할 뻔 했다가 아내의 도움으로 돈을 되찾은 후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장면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고,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다는 남편 앞에서 넋이 나간 듯 말이 없던 아내는 앞에 말한 대사를 던집니다. 드라마이긴 하지만 분노와 슬픔을 삭히며 남편에게 쏘아 붙인 아내의 두 문장 대사에는 어떠한 심정이 담겨 있었을까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며 결혼 생활을 20~30년 이상 한 중년의 부부라면 굳이 설명을 안 해도 짐작이 가능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당신을 이 지경까지 만든 것도 나 자신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을 탓하겠소? 잘못은 내게도 있는 거지요. 그래서 부부는 닮아간다고 세상은 말하지 않습디까?

 

부부는 공동운명체고, 한 쪽만 봐도 나머지 한 쪽의 과거 흔적이 보인다는데 당신의 일탈을 막지 못한 나도 바보 아니냐는 정도의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부는 공동운명체, 한 쪽만 봐도 나머지 보여

 

대사를 들으며 저는 움찔했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에 민감한 방송작가가 써넣은 문장이 분명하지만 체념과 원망이 가득 섞여 있을 이러한 대사에서 제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통의 한국 중년 남성들 중 상당수가 비슷한 처지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의 가정부터 그렇습니다만 한국 사회에서 부부 관계는 아직 평등하다거나 민주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중년 이상의 세대라면 더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아의식이 강하고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젊은 부부들은 대등하고 수평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습니다만 중년 세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성은 아내와 어머니로서 양보하고, 인내하는 역할에 더 치중했다고 봐도 틀림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통의 남편들은 아내 덕에 안심하고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 있었고, 아내에게 진 빚이 많지만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회한이 뒤범벅된 여자 주인공의 대사를 들으며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슬그머니 떠올린 이날의 경험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표현이 들어맞았다고나 해야 할까요?

 

 

‘거울’이라는 말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도 흔치 않습니다. 생활 주변 어디에도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처럼 사물을 똑바로,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도구는 거의 없습니다. ‘정직, 정확’이라는 두 단어와 그대로 연결될 정도입니다. ‘부부는 상대방의 거울’이라고 말한 대사에는 두 사람의 인생 여정이 상대방의 행동과 말투, 얼굴 표정에 고스란히 나타나니 이를 잘 명심하라는 뜻으로 저는 풀이하고 싶습니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중략-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이상이 1934년에 발표한 시 ‘거울’을 들여다 보노라면 ‘거울 속의 나’는 ‘아내’요, ‘ 반대요마는 또 꼭 닮았다’ 는 대목은 ‘부부는 판박이처럼 닮아간다’는 세상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들어맞는 것 같아 흥미롭기까지 합니다.

 

늙어가는 대한민국, 늘어나는 독거노인

 

쓸쓸한 노년노인 가구이야기가 느닷없이 다른 방향으로 흐릅니다만 통계청이 최근 ‘장래가구추계’라는 자료를 발표하면서 늙어가는 대한민국, 우울한 중년 세대의 어두운 내일을 알렸습니다. 통계청은 저출산 영향으로 2045년이 되면 1인 가구와 자녀가 없는 부부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1∼2명의 자녀가 있는 집을 떠올리던 대한민국 '보통 가정'의 모습이 크게 바뀔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또 고령화 영향으로 1인 가구주 5명 중 1명은 70대가 되면서 독거노인 수도 현저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70대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이 1인 가구의 적어도 다섯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니 부부는 상대방을 비춰주는 거울이라 해도 이 때가 되면 비춰 줄 거울도 없고, 닮고 싶어도 닮을 상대방이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기대 수명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의 임페리얼 칼리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30년에 태어나는 한국인은 남자 84.07세, 여자 90.82세까지 살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기대수명 단연 세계 1위인 겁니다. 이 숫자 하나만 봐도 늙어가는 대한민국의 중년 베이비부머들은 고독하고 힘든 노년을 보낼 확률이 상당히 높습니다. 특히 남성보다 기대수명이 6~7년 더 긴 여성들이 고독하고 힘든 노후를 보낼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라면 아내의 거울(남편)보다 남편의 거울(아내)이 노년 고생을 훨씬 더 많이 겪을 수 있다는 진단입니다.

 

부부가 함께 만드는 맑은 거울은 행복지킴이

 

자, 어떻습니까? TV드라마의 대사에서 출발했지만 제가 들려 드리고 싶은 이야기의 최종 목적지는 고독한 노년 피해가기입니다. 잠시라도 틈만 보이면 우리 곁을 파고 들 외로운 노년, 힘든 노년을 멀찌감치 떼어놓으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는 제 나름의 질문과 답이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부부가 아끼고 도우며 서로의 거울을 빛나는 보물로 만드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갖고 싶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싶어 하는 거울이 돼 행복의 열매를 보다 크고 탐스럽게 가꿔가자는 것입니다.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처럼 밝고 맑은 거울이라야 물체를 잘 비출 수 있습니다. 마음이 지극히 안정되고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일 겁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밝고 맑은 거울이 된다면 가정은 늘 평화롭고 노년의 고독, 외로움의 공포도 쫓아버릴 ‘철옹성’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