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얼]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한국인의 얼] 국보 제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조선왕조 최고 석탑 작품으로 손꼽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에 대한 이야기.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에 우뚝 서 있는 ‘원각사지(圓覺寺址) 10층 석탑’은 조선왕조 때에 세운 석탑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각광받는 문화재이며, 국보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보 제1호는 서울 남대문인 ‘숭례문’이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 나무위키

조선시대 석탑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단종애사를 일으키고 조선 제7대 왕위에 오른 세조 12년(1466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10층 석탑은 석재의 아름다운 회백색과 탑의 우아함이 멋진 앙상블을 이루듯 조화를 엮어낸다. 그래서 육중한 석탑이 예술적 기교를 발산하며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3중 기단(基壇)에 평면을 아(亞)자 형태로 만들고 12m 높이로 세웠다. 탑신부(塔身部)는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평면이고 4층부터는 네모꼴로 축성하였다. 옥신(屋身)에는 밑에 난간을 둘러쳤다. 

 

1층에는 용, 사자, 모란, 연꽃을 조각하였고, 2층에는 인물, 새, 짐승, 풀, 나무, 궁전 건물 등을, 3층에는 나한상(羅漢像)과 선인(仙人)들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는 각 층마다 갑석(甲石) 밑에 당초문(唐草文)을 새겨놓고 그 위에 난간 형을 모각(模刻)하여 세련되고도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면석(面石)에는 12회상의 부처님, 보살, 천인(天人)을 조각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둥근 기둥을 모각하여 세웠다. 옥개석인 지붕들은 각층마다 8작 지붕으로 만들었으며 밑에는 공포(栱包)를 조각하였고 빗물이 떨어지는 낙수 면에는 기와를 얹었다.

 

특히 2층의 지붕은 궁전의 지붕과 같은 형태이고 3층은 2중의 지붕을 만들어 그 기교와 아이디어가 매우 뛰어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적 제354호인 탑골공원을 파고다 공원이라고도 하는데, ‘파고다’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인도 말의 ‘불탑’을 일컫는다. 그런 연유로 이 지역을 옛날에는 탑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중종 때에 이르러 원각사 절을 헐어버려 흔적도 없어졌다, 다만 절 앞에 서 있던 ‘원각사비’가 보물 제3호로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탑골공원 중앙의 팔각정은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때에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곳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성지이기도 하다. ‘원각사지(圓覺寺址) 10층 석탑’은 탑 전체의 형태나 세부 구조 및 표면의 조각, 그리고 탑의 재료로 사용한 대리석 등이 경복궁 안에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과 닮았다.

탑골공원 전경

다만 국보 제86호인 경천사 10층 석탑은 ‘원각사지(圓覺寺址) 10층 석탑’보다 120여년 전인 고려 제29대 충목왕 4년(1348년)에 세웠다. 이 탑은 본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경천사 절에 세운 것인데, 1909년 일본 사람인 다나카 미쓰아키에 의해 일본 도쿄로 반출되었던 것을 반환해 온 것이다.       

 

원각사의 유래

 

원각사(圓覺寺)는 탑골공원에 있던 조선시대의 명찰(名刹)이었다. 세조 10년(1464년)에 지은 절인데 당시 규모로서는 가장 큰 절이었다. 세조가 양주 고을 회암사에서 법회를 갖던 중에 원각경(圓覺經)을 송경하던 숙부인 효령대군 앞에 여래가 나타나서 사리를 분신(分身)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한 세조가 그 영험함을 기리기 위하여 옛날 고려 때의 흥복사가 있었던 절터에 원각사를 건립한 다음에 10층 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부식과 마모를 막기 위해 유리관을 씌웠다.

그런데 조선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재위 10년이 되던 1504년 원각사를 폐지하고 장악원을 설치하여 기녀들을 육성시키는 훈련장 겸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기생들과 풍유놀음에 빠졌던 연산군은 전국에서 미녀들을 징발하여, 장악원에 합숙시키면서 기녀로 양성하였던 것이다. 

 

본래 장악원(掌樂院)은 조선시대 때 성률의 교열, 곧 음성의 흐름을 바로 잡아주는 성악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말기의 전악서와 아악서를 계승하였으며, 세조 때에 장악서로 개편하였다. 이곳에 악사를 배치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양반 가문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교육시켰는데, 연산군 때에 이르러 미녀를 징발하는 ‘채홍준사(採紅駿使)’ 관리를 각도로 파견하여 전국에서 미녀들을 뽑아다가 기녀교육을 시키면서 임금의 향락을 위한 방탕의 기구로 만들었던 것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고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제11대 중종은 장악원의 폐습을 없애버린다면서 원각사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재목으로 민가를 짓게 하였다. 중종은 연산군 때에 변질된 장악원의 제도를 고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한 뒤 본래의 기능을 되살렸다. 장악원으로 변모되어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탓에 헐린 원각사 자리는 350여년 동안 폐허로 내려오다가 제26대 임금인 고종 때에 공원으로 개방하여 탑골공원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전성기뉴스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지난 2015년 9월 첫 문을 열었던 <전성기뉴스>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보다 가까이에서 소통하기위해 SNS 채널을 개설, 50+를 위한 유익한 콘텐츠를 지속 제공합니다.

전성기뉴스는 2017년 12월까지 운영되며, 기존 콘텐츠는 라이나전성기재단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콘텐츠 보러가기

그동안 <전성기뉴스>를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SNS 채널에도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