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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야사] 《뎨국신문》의 언론인들-신문기자 이승만(3)

이승만이 기명 기사로 논설을 쓴 것은 1898년 3월 19일자 《협성회회보》제12호에 실린 ‘러시아가 요구한 부산 절영도(영도)의 조차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논설이다.

《협성회회보》와 《매일신문》기자 시절의 청년 이승만.

절영도는 1885년에 이미 각국 상인들의 거류지로 사용하던 곳이고 일본은 그곳에 석탄저장고를 설치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고종의 이관파천으로 기세가 오른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1897년 8월 고종에게 절영도 조차(租借)를 요구했다. 10월에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스페이에르도 같은 요구를 하자 친러 정부는 이것을 허락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이런 요구를 강력히 규탄하고 나섰다. 1898년 2월 22일 국권수호와 내정 개혁을 강력히 촉구하는 상소를 올린 독립협회가 처음으로 당면한 일도 바로 이 문제였다.

 

독립협회는 외부대신 서리 민종묵에게 정부의 방침을 밝히라는 편지를 보냈고, 러시아에게 조차권을 거절하려면 이미 허여된 일본의 석탄기지도 철거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면서 외부에 철거를 요구하는 서한도 보냈다.

 

이승만의 논설은 이런 시점에 맞춰서 집필된 것이었다. 이 사설로 이승만의 진가는 빛나게 된다. 사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저 대한 정부에서 대한 땅을 임의로 하는 권리가 있은즉,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아니 주는 것이 정의에 고르지 못하다고는 할지언정 경계에 틀리다고 할 수는 없는지라. 또한 전에 어찌하여 일본에 땅을 좀 빌려주었다고 동맹제국을 다 같이 대접하자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제국에 다 공평히 빌려주어야 할 터이니 삼천리강산이 몇 조각이나 남겠으며, 겸하여 그 후에는 세계 각국이 다 토지를 바라고 대한과 통상조약을 청할 터이니, 누구와는 약조하고 누구와는 아니하면 또 공평치 못할 터인즉, 동서 칠십여 국을 무엇을 가지고 고루 정답게 대접하리오.

 

땅을 아주 주는 것이 아니라 조차하자는 것이므로 괜찮지 않다고 하니, 이는 전국을 다 주어도 빌리는 것인즉 관계치 않다 하는 말이라. 만일 남이 나와 정 있다고 내 물건을 달라는 사람은 내 친구가 아니라 곧 나를 꾀어 물건을 탈취하자는 도적이라. 내 것이다 없어져서 더 가져갈 것이 없기 까지만 정다운 친구이니, 그런 친구는 없느니만 못한지라.

 

이는 우리가 일본에 후하고 러시아에 박하게 하는 듯하나, 연전에는 우리가 적연(的然:정확)히 몰랐고, 지금인들 정부에서 특별히 백성에게 광고하여 우리를 알게 하여 준 것은 아니로되. 요행히 황천이 묵우(默祐:말없이 도움)하심을 힘입어 국 중에 신민이 생긴 후로 그 중에서 새로 배운 것도 많거니와, 첫째 내 나라 정부 시세와 국중 소문과 외국 형편을 소상히 알아 상하 원근이 정의를 상통하여 각히 이산한 마음이 적이 합심할 만하게 된지라.

 

우리가 특별히 국운을 남보다 더 입어 독히 충성이 갸륵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알고 본즉 진실로 애달프고 원통한 중 당초에 우리가 내 나라 일을 남의 일 보듯 하는 까닭에 이런 일이 생겼은 즉, 다만 말로만 시비할 뿐 아니라 장차 목숨을 결단코 이런 일을 눈으로 보지 않기로 작정할지라. 그런즉 우리가 암만 말하여도 실효가 없으니 말하는 우리나 말 아니하는 남이나 조금치도 다른 것이 없다 할 듯하나, 말만 하여도 국중에 백성이 있는 것을 보임이요, 또한 전국 백성이 우리와 같이 일심으로 한마디씩 반대할 만하게 되었으면 당초에 남의 토지를 달랄 리도 없거니와 설사 달라더라도 그 동안 대한 일천이백만 명 백성 중에서 무슨 거조(擧措:무슨 일을 꾀하거나 처리하기 위한 조치)가 있을지 모를지라.

 

그런고로 지금 우리가 내 물건 달라는 친구를 시비함이 아니라 이 백성 중에 몰라서 아는 체 못하는 자와 알고도 모르는 체 하는 자의 죄와 책망이 더 큰지라. 우리는 바라건대 우리 동포들을 무슨 일을 물론하고 대한 일이라 하거든 다만 내 나라 일로만 알 것이 아니라 내 집안 일로 아시고 각기 생각하는 대로 서로 모여 쓸데없는 공론과 시비라도 좀 하여 보시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자칫 현학적으로 빠질 경향이 높은데 이처럼 쉬운 한글 문장으로 대중의 마음을 설득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만 보아도 이승만의 문장력과 설득력이 뛰어난 언론인이었다. 당시에는 이만한 기사를 쓸 언론인이 거의 없었다.

 

이승만은 이 논설 한 편으로 신문기자로서의 명성은 물론 젊은 정치가로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이 논설은 《매일신문》이 발행되기 전인 3월 10일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종로에서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인 탁지부고문과 교련교관의 해고와 절영도 조차요구를 거부한 대중 집회에서 이승만이 행한 연설과 내용이 같다. 이승만은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추진하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독립신문》의 서재필도 이승만을 크게 주목하고 만민공동회에 자주 강사로 불러들였다.

 

《매일신문》 창간과 이승만

이승만이 처음 기자로 활동한 협성회회보 창간호.

이승만은 일주일에 한 번 발행하는 신문으로서는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서양처럼 매일 발행하는 신문을 만들고 싶어 했다. 때마침 아펜젤러는 점점 강해지는《협성회회보》의 시국 비평 논설에 학생회보로서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매우 염려스러워 했다. 배재학당은 정부의 위탁교육 기관이고 정부와 재정보조 협약을 맺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승만 등 편집진들을 불러 논조의 조정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미 속 시원한 비평적 논설에 맞을 들인 독자들의 요구 때문에서라도 신문의 논조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결국 타협점은 《협성회회보》를 학교 교문 밖에서 독립적으로 만드는 방법 밖에 길이 없었다.

 

협성회는 회보를 교내에서 14호까지를 만들고 제15호부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이하 매일신문으로 표기)으로 바뀌어 발행한다. 발행주최는 역시 배재학당의 협성회였다.

 

이승만은 창간 논설에서 “대범 서양제국서는 국 중의 신문 다소를 가지고 그 나라 열리고 열리지 못함을 비교하거늘 우리나라에 신문이 얼마나 되느뇨. 과연 부끄러운 바라. 만행으로 《독립신문》이 있어 영자로 발간하매 외교상과 나라 권리 명예에 크게 관계되는 영광이라. 그 외 《한성신보》와 두세 가지 교중(敎中) 신문이 있으나 실상은 다 외국 사람의 주장하는 바요, 실로 우리나라 사람이 자주하여 내는 것은 다만 《경성신문》과 우리 신문 두 가지뿐인데, 특별히 《매일신문》은 우리가 처음 시작하니, 우리나라 사천년 사기에 처음 경사라 어찌 신기하지 않으리오. 아무쪼록 우리 신문이 문명 진보에 큰 기초가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라노라.”고 밝혀 《매일신문》을 발행한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느꼈다.

 

《매일신문》 창간 경위에 대해 이승만은 “나는 배재학당에서 다른 학생들과 《협성회회보》를 시작하였고, 그 주필이 되었다. 작은 학생신문이 정부 고관들을 비판하게 되자 곧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아펜젤러 교장은 우리에게 논설을 검열 받으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신문으로는 발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독립정신이 강한 유영석(柳英錫)과 나는 학교를 나와서 한국 최초의 일간지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리더러 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 그런 신문을 발간하면 위험하다고 했으나, 《매일신문》은 아주 호평을 받게 되어, 서재필 박사는 우리 신문 때문에 자기의 신문을 팔 수 없다고 까지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23세 때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로 인하여 이승만은 개화파 지식인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해방된 후 귀국해서도 《매일신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기자들 앞에서 자랑했을 정도다. 1945년 10월 23일 전 조선신문기자 대회 석상에서 “지금부터 50년 전 내가 배재학당에 있을 때 《협성회회보》를 발행하여 당시의 부패한 관리와 무능력하고 완고한 정부를 탄핵하고 다시 《매일신문》으로 이름을 고쳐 정부의 압박을 물리치니 민중의 절대적 지지 아래 신문 발행을 계속하던 기억이 새롭다”라고 자랑했다. 

 

러시아·프랑스 이권 요구 외교문서 폭로 사건 

 

《매일신문》은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대한의 자주와 개화, 독립을 주장하는 만큼 정부와 외세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8년 5월 16일자(제32호)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이권 요구 외교문서 폭로사건이었다. 러시아 측이 우리나라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 근방 사방 10리를 사겠다는 것과 프랑스 측이 평양의 석탄광 하나를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사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 측은 이미 1896년 6월에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같은 날자 일본인이 발행하는 《한성신보》도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것은 《매일신문》의 기사로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신문을 보고 독립협회는 정부에게 사실의 전말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본국의 땅은 선왕의 강토요 인민이 생업 하는 땅인데, 이를 정부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독립협회는 이 일에 대하여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와 프랑스 공사관은 《매일신문》기사를 보고 당황했다. 그들은 《매일신문》을 군대보다도 더 무서워하고 귀찮아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신문을 직접 억압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그들은 외부(외교부)를 통해 신문을 규제할 수 있는 법을 만들도록 하고 국가 기밀인 외교 문서를 폭로한 기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도 신문을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어 당혹해했다. 정부는 외국 공사관의 항의를 전하며 은근히 압박했지만 《매일신문》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만일 《매일신문》기재원(기자)에게 현저한 죄과가 있거든 법에 따라 마땅히 처벌하고, 죄과가 없으면 죄 없는 이유를 프랑스 공사에게 밝혀 양국 교제상 체례(體例)를 서로 손상함이 없게 하라”는 등 결의문을 외부대신 조병록에게 보내면서 맞섰다. 

 

외부는 5월 17일 《매일신문》기자 이승만을 소환하여 외국 공사들이 기사에 대하여 항의한다는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매일신문》은 나라를 위해 국민에게 마땅히 알려할 일이라고 답변하며 신문의 국가적 사명을 들어 항의했다. 5월 16일자의 기사도 역시 이승만이 작성한 폭로기사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나라에 신문을 규제할 수 있는 법의 필요성을 일깨우게 했으며 고종의 명으로 신문 규제법의 시안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주목 해야 할 사건이다. 이 단초를 이승만 기자가 제공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서재필의 미국 귀국과 이승만

 

이승만은 《매일신문》신문의 저술인, 사장은 물론 기자, 주필로서도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신문에 종사하면서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석하여 정치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쳐나갔다.

 

그는 1898년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그의 도미를 저지하려는 만민공동회 총대의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총대의원 세 사람은 이승만, 최정식, 정항모였다. 그들은 서재필의 도미를 만류하기 위해 외부와 서재필 본인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그들은 서재필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첫째로 황제의 큰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고, 둘째로는 조상의 끼친 덕을 잊어버리는 것이며, 셋째로는 동포의 공변된 의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미국으로 돌아가거나 머무는 것은 자유로운 의사에 달린 것이지만 조국을 버리고 어디로 가서 천고에 썩지 않을 이름을 남길 것인가라고 만류했다.

 

이 공개서한은 《매일신문》에 실린 기사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고집하는 서재필을 비판하는 투로 굳이 미국으로 귀환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일신만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의 의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평가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매일신문 1898년 5월 3, 4, 5일자 신문의 기사다. 그러나 서재필 본인의 사정은 이런 기사와는 상관없이 외교문제 상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서재필이 단 몇 년 만이라도 더 한국에 머물며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일을 추진했다면 조선의 개화는 많은 진전을 보았을 것이며 적어도 나라를 빼앗기는 터무니없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뎨국신문》의 주필, 이승만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협성회 사장에 올라 《매일신문》을 직접 경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으나 내분으로 물러나게 된다. 최정식과 유영석이 관여된 경영권 분쟁 때문이었다. 이승만이 이 사건에 직접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 두 사람의 해임과 더불어 이승만도 책임을 물어 협성회에서 출회 당했다. 

 

최정식과 유영석은《매일신문》의 인쇄기를 소송으로 빼앗아 와 《일일신문》을 창간했다. 그러나 결국 《매일신문》에게 인쇄기를 빼앗겨 《일일신문》은 얼마 되지 않아 발행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일일신문》에 잠시라도 몸을 담았다는 사실이다. 유영석은 신문 판매와 경영의 전문가이고 이승만은 신문 편집의 전문가였다. 이 둘만 힘을 합하면 신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역량을 가진 자들로 평가를 받았다. 이승만은 날카로운 논설로 스스로 많은 독자를 가진 민완기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뎨국신문》의 창간에도 이승만이 가장 중요한 스텝으로 스카우트되어 참여하게 된다. 

 

《매일신문》측에서는 《뎨국신문》 창간 직후인 8월 12일자부터 23일자까지 10여 차례나 이승만의 논설이 실린 《뎨국신문》이 협성회의 《매일신문》과는 별도의 다른 신문이라고 사고를 게재했다. 《매일신문》에서의 이승만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신문기자로서의 진가는 《뎨국신문》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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