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도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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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50대 중반 귀촌을 했고 20년이 지난 지금, 70이 돼서 다시 도회지로 나왔다. 전원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도시로 나온 이유.

각박한 도시생활로 심신이 고단해진 탓일까? 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나도 새 밀레니엄에 대한 설레임과 불안감이 엇갈리던 1999년 봄에 한적한 농촌으로 이주를 ‘결행’했다. 내딴엔 단단한 각오와 결심 끝에 내린 결정이니, ‘결행’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또한 귀촌 대신 굳이 ‘이주’라고 표현한 것은,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 살면서 과거처럼, 또는 새롭게 영농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일반적 의미의 귀농일 터인데, 나는 고향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냥 서울 근처의 낯선 지역인 양평으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년만에 양평에서 다시 서울과 접해있는 하남 아파트촌의 번잡한 도회지로 나왔다. 물리적인 거리로 따지자면 양평에서 하남까지는 승용차로 한 시간이 채 안 걸리지만 신도시 비슷하게 4만 세대 가까운 아파트가 촘촘하게 세워지고 입주도 얼추 끝나가는 터라 이 새로운 도회지의 분위기는 꽤 벅적거리고 어수선했다. 그 때문일까? 막상 소란스런 도회지로 나와보니, 한적한 삶 속에선 느끼지 못했던 이른바 산촌생활의 안온함이 크고 귀해 보인다. 바깥으로 벗어나니 안에서 보지 못하거나 작게 느꼈던 모습이 짙게 비친다고나 할까.

 

내가 20년 가까이 살았던 곳은 양평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서종면 명달리다. 양수리에서 청평 쪽으로 북한강을 거슬러 10여분 정도 달리다가 문호리에서 중미산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얼마간 가면 명달현이라는 큰 고개를 만나는데, 이 산고개를 넘으면 중미산 기슭 깊숙이 들어앉은 명달리에 닿는다. 주민이 100명 남짓한 조그만 산골 마을이다. 중미산은 해발 834m의 꽤 높은 산으로 그 산줄기가 양평과 가평의 경계를 이루며 삼태봉, 통방산, 화야산, 고동산을 거쳐 북한강으로 떨어진다. 나는 해발 700m 가까운 삼태봉 기슭에 살았는데 이 가파른 봉우리를 넘으면 가평군 설악면이 된다.

이런 입지 탓일까? 깊은 산골의 맑은 공기와 조용한 생활환경을 좇아 병환이 깊은 사람들이 정양을 위해 명달리를 찾기도 한다. 게다가 이곳을 찾는 이마다 서울 근교인데도 강원도 산골 같은 냄새가 난다고 입을 모은다. 사실 이런 입소문이 나면 청량하고 안온한 생활환경이나 경관은 금새 망가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명달리는 산과 계곡이 깊고 넉넉한 탓인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분위기가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이쯤 되니, 처음 이사했던 18년 전의 모습은 상록의 그린 속에 파묻힌 정밀 그 자체였다. 사위가 고요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 정밀감이다.

 

이런 환경에서 지낸 20년 가까운 나의 양평 산촌생활 모습은 집사람 말마따나 얌체 같은 삶이었다. 집 사람은 “땅에 기대 살겠다고 시골로 온 사람이 그 땅에서 거둘 생산에 힘을 보탤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라고 되풀이 꾸짖었지만 난 도무지 열댓평되는 텃밭에서 무엇인가를 가꾸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사실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집 주변에서 자라는 무성한 잡초를 뽑고 베는 일은 그야말로 잡초와의 전쟁이라 할만 했다. 나로서는 반년 가까이 이어지는 이런 싸움만으로도 힘 빠지는데 땅 엎고 고랑 파고 씨 뿌리는 일까지 하려니 버겁다는 느낌이었다. 집 사람에게는 이런 변명으로 텃밭 가꾸기를 회피했지만 속내는 그와 달랐다.

우선 집 뒤쪽의 울창한 잣나무 숲과 도처에 거대한 암석을 드러내고 있는 가파른 산봉우리, 그리고 깊디깊은 계곡이 이뤄낸 장대한 경관이 텃밭 가꾸기를 마냥 소소하게 비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자연주의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PC 앞에 붙어 앉아 얼마간 할 일이 있는데다, 봄철 되면 갖가지 야생화 찾기나 관찰에 골몰하고 여름철엔 골짜기를 뒤덮은 짙은 녹음과 시원한 계류에 이끌리며 가을이 되면 계곡 단풍에 눈길이 쏠리는 판에 그 조그만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무슨 먹거리의 재배와 수확에 큰 의미를 붙이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 좀 우습게 비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속내를 함부로 드러낼 수도 없어 3월말 밭갈이 직전에 20kg 안팎의 축분 퇴비 서너 포대를 따서 뿌려놓는 정도만 거들고 허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텃밭을 벗어났다.  

 이처럼 청정한 환경에서 텃밭을 외면한 채 20년 가까이 안온한 전원생활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아릿한 적막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50대 중반까지 푹 젖어있던 도회지 생활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한겨울 눈 속에 덮혀 있을 때는 불쑥 밀려드는 그런 적막감이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70 고개를 바라볼 즈음부터는 몸 이곳 저곳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병원 걱정이 앞서게 되자 이곳에서 여생을 보낼 자신도 없어졌다. 결국 점차 깊어지는 쓸쓸함과 건강 문제로 농촌생활을 청산하고 도회지로 나왔지만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려면 한동안 어려움을 겪을 법 하다. 양평 전원생활은 주말에 가끔씩 집 앞쪽 임도로 들이닥치는 오토바이족들의 질주를 제외하면 바쁜 걸음도, 빠른 움직임도 찾기 어려워 늘상 안온한 느낌인데, 도회지는 아무래도 일과 경쟁에 쫓기면서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거나 빠르게 움직이니, 소음도 많고 느긋함과도 거리가 멀다.  

사실 도회지로 나가면서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바로 이런 생활 소음이었다. 그중에서도 18년만에 다시 살게 된 아파트의 층간 소음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 지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건축 자재의 품질이 좋아진 탓인지, 아니면 서로 신경을 쓰고 조심하는 탓인지 생각처럼 층간 소음이 심하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 또한 모든 창호는 이중창에, 두겹으로 시공되어 있어 바깥 소음을 차단하는 구실을 톡톡히 했다. 소음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아파트단지 생활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잿빛 콘크리트 숲에 갇힌듯한 답답함이 있어 연중 변함없이 푸르름을 자랑하는 잣나무 숲 속의 안온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도회지로 나온 지 석 달쯤 된 지금까지도 얼마간의 위선과 속물성이 용인되는 도시의 각박하고 부산한 삶이 불편하지 않다. 한밤중 화장실을 찾은 뒤 거실 커튼을 열고 내다보면 즐비한 빌딩에 밤새도록 불이 켜진 정형외과 의원과 던킨 도넛의 네온 간판이 보이는데, 이런 네온에 걸린 도회지 특유의 나른한 퇴폐성도 공연히 정겹게 느껴진다. 이런 느낌 속에서 오랜 산골생활로 쌓인 적막감의 깊이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50대 중반에 내던진 도회지 생활에 대한 짙은 향수와 미련을 자아낸 것이 다름아닌, 이런 적막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8회로 다룬 필자의 “서울 촌놈 양평살이”에서 지적한 것처럼 나이 들어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점차 깊어지는 적막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너무 외진 산골은 피하고 때묻지 않은 산천에, 마트와 약국, 우체국, 철물점, 버스 정류장 정도는 갖춰진 면소재지 주변쯤에 자리잡는 것이 좋을 듯싶다. 그래야 한가한 시골 분위기도 누리고 지난 삶의 근거지로도 자주 오고 감으로써 적막감을 덜면서 전원생활을 무리 없이 이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