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의 애정 편력]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세기적 사랑 ②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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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의 애정 편력] 에드워드 8세와 심프슨 부인의 세기적 사랑 ②

이혼녀를 사랑한 국왕의 세기적 사랑의 두 번째 이야기.

 

두 사람의 세기적 사랑을 그린 드라마 포스터.

 

타오르는 불꽃

심프슨 부인에 대한 황태자의 사랑은 하루가 다르게 뜨겁게 타올랐고 심프슨 부인도 정성을 다해 이 사랑을 받아 들였다. 황태자는 이때부터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왕위 계승자로서 한 번의 이혼 경력과 또 현재는 유부녀인 여성과 결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영국 왕실은 이혼한 여성과는 절대로 결혼 할 수 없다는 요지부동한 법률을 가지고 있었다. 황태자도 심프슨 부인도 사랑으로 인한 고뇌가 차츰 심각해져 갔다. 이때 황태자의 부친이며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5세가 세상을 떠났다. 당연한 노릇으로 황태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40대 대영제국의 국왕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올랐다. 1936년 1월, 42세 때였다. 두 사람의 결혼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심프슨 부인도 결혼을 단념하고 오히려 국왕에게 왕비로서 어울릴 수 있는 규수를 찾아보라고 간곡히 진언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가 심프슨 부인에게 바치는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한 발 더 나아가 자기와 결혼 할 수 있도록 남편과 헤어지는 법적 절차를 밟으라고까지 했다. 당시 영국 신문과 방송들은 ‘국왕과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영국 왕실은 발칵 뒤집혔고 해외에 나가 있는 영국 국민들도 이 소문이 사실이냐고 왕실에 산더미처럼 많은 문의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영국 왕실과 의회, 국민에게 심프슨 부인은 국왕을 현혹시킨 공적(公敵)이 되었다. 당시 볼트윈 수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왕실과 정부를 대표해 국왕을 만나 “이 소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달라고 호소했다.

 

드라마 속 한 장면.

 

왕관을 버리다

그러나 국왕의 태도는 엉뚱했다. 심프슨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으며 오히려 수상에게 심프슨 부인과 결혼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국왕의 결혼 문제는 이제 온 나락 들썩들썩 할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으며 국왕은 기진맥진 해졌다. 국왕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국왕 에드워드 8세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남짓 만인 1936년 12월 11일 BBC방송국의 마이크 앞에 섰다. 비장하고 역사적인 발표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몇 시간 전 나는 국왕으로서 최후의 일을 마쳤다. 나는 사랑하는 여성의 도움과 이해 없이는 국왕으로서의 책임과 임무를 다 할 수 없다. 이런 나의 심정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결정은 내 자신이 한 것이며 조국에 언제 돌아올지는 모른다.”

 

왕위에 오른 지 326일만에 사랑을 위해 지존의 자리를 버리고 외국으로 떠나야만 하는 국왕의 심경은 비장했다. 이 엄청난 대사건은 당시 세계 최대의 화제가 되었으며 전 인류의 절반이 이 방송을 들었고 세계의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 감격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동생 조지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윈저 공이 된 에드워드 8세는 퍼붓는 빗속에 구축함을 타고 프랑스로 떠났다.

 

세계에서 가장 우아하고 화려한 여인

프랑스에 거처를 마련한 윈저 공은 파리에서 심프슨 부인의 이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5월 3일 마침내 심프슨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간통혐의로 피소 됨으로써 이혼이 결정 되었고 심프슨 부인은 윈저 공 곁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6월 3일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성에서 두 사람은 감격의 결혼식을 홀렸다. 당시 윈저 공은 43세였고 심프슨 부인은 41세였다. 처음 만난 지 7년만의 결실이었다. 심프슨 부인의 눈빛에 어울리게 만든 신부복은 위리 블루라는 새로운 색을 유행하게 했고 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옷을 모방했다. 이 날 결혼식의 하객은 겨우 16명뿐이었고 당연히 영국 왕실에서는 단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국 왕실은 심프슨 부인에게 작위는 커녕 왕실의 격식에 맞는 어떤 호칭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결혼 후에도 전 남편의 성을 따라 심프슨 부인으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생활도 안정이 되어 마음껏 인생을 즐길 수 있었다. 한때는 무릎 위에 올라오는 짧은 치마를 입는 등 세계에서 가장 옷 잘 입는 여성으로 꼽히기도 했다. 미국 평민 출신의 이혼녀로 외모가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심프슨 부인. 그녀가 영국 황태자와 유럽 사교계를 매혹시킨 것은 개성적이고 세련되며 우아한 스타일 덕분이었다. 1930년대 유명한 사진가 세실 비통은 이렇게 말했다. “월리스 심프슨은 우아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현재 그녀의 스타일은 런던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녀가 런던 사교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신의 우아한 의상에 대해 심프슨 부인은 “남편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눈길을 끄는 외모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남 보다 멋진 옷을 입는 것 뿐이다. 파티 장소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면 남편은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그게 나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쓸쓸했던 말년

고국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하는 윈저 공은 고국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 6세 국왕에게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간곡히 전했다. 그러나 조지 6세는 단호했다. "형이 돌아오면 헌법적 갈등이 생긴다. 만약 내 허락 없이 돌아오면 생활비 지원을 끊을 것"이라며 답변을 보냈다. 한 번은 뉴욕에서 벼락부자가 된 한 청년이 집요하게 그녀에게 접근 한 뒤 어느 만찬회 자리에서 연애편지를 써서 웨이터를 시켜 전달하기 까지 했다. 심프슨 부인은 이 편지에 요염하게 웃으며 태연이 답장을 써 보내기도 했다. 윈저 공과 심프슨 부인이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 그 청년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세기의 사랑도 여기서 끝장이 나나 보다’ 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윈저 공을 둘러쌌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났을 뿐 두 사람의 사랑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 가 없었다.

 

두 사람은 죽는 날까지 함께 있었다. 윈저 공은 나일론 스타킹이 처음 나왔을 때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그것을 사서 갖다 줄 정도로 부인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 세기의 사랑도 1972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해 5월 28일 78세를 일기로 윈저 공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윈저 공이 사망한 뒤 그녀는 파리의 자택에서 술과 외로움으로 말년을 보냈다. 말년에 가서는 지극히 절망적이어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적막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14년 뒤 심프슨 부인도 윈저 공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1986년 4월 24일 파리에서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것이다. 심프슨 부인은 영국 왕실 묘지 내 윈저 공 곁에 나란히 묻혔다.

 

반세기에 걸친 사랑의 신화는 이로써 영원히 막을 내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