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야사]《뎨국신문》의 언론인들-신문기자 이승만(7)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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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야사]《뎨국신문》의 언론인들-신문기자 이승만(7)

이승만의 석방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석방운동을 했다.

세련된 모습의 중년시절의 이승만.

제일 많은 수고를 한 사람들은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공사 알렌도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승만의 가족까지도 돌봤다. 그의 아내 박승선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옥중에 사식을 넣어준 것도 이들 선교사들의 도움이었다. 다음은 정치적으로 적이었던 황국협회의 홍종우였다. 어찌된 일인지 탈옥과 역모 사건의 재판장이던 홍종우는 이승만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감옥서장 김영선이었다. 그는 1900년 2월 12일 감옥서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는데 그는 이승만이 옥중 생활을 통하여 인격적인 성숙과 학문의 진전을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는 이승만에게 글을 쓸 수 있도록 자유를 주었으며 학문에 관한 책은 무엇이든지 번역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뿐만 아니라 번역에 대한 대가도 두둑하게 지불해주어 이승만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물론 옥중의 동료들도 이승만을 도왔다. 처음 그가 목에 칼을 차고 손발이 묶였을 때 그의 칼 위에 성서를 놓고 책장을 넘겨주었던 것도 그의 동료 죄수들이었다. 그가 집필한 것을 정서하고, 대필하고, 독서를 돕는 등 그들의 노력도 빼 놓을 수가 없다. 한규설과 민영환도 이승만의 석방을 크게 도왔다.  특히 한규설은 힘이 닿는 데까지 이승만의 가족도 돌보았다.   

 

이승만은 1904년 8월 9일 민영환․ 한규설 등 혁신파가 정권을 잡자 그들의 도움을 받아 특별사면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다. 구금된 지 정확하게 5년 7개월 만이었다. 그의 나이가 어언 29세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옥중에 있었지만 이젠 전 국민이 그를 알아주는 정치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석방은 그 자체로도 뉴스였으며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이 매우 기뻐했다. 그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특별히 미국인들에게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선교사들과 자신의 장래 협의

 

이승만은 출옥 후 여러 선교사들과 만나 자신의 장래 진로에 대해 조언을 들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아직 누구에게도 세례도 받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여러 선교사들과 교우를 맺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특정 선교회를 선택하여 세례를 받게 되면 다른 교파의 지인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는 여러 교파가 탐내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기독교에서 세례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세례를 받은 교인은 정식 교인으로 인정된다. 

 

이승만은 오랜 고민 끝에 연동교회의 게일(James S. Gale) 목사에게 세례를 받으러 갔다.  그러나 게일 목사는 위와 같은 배려로 당장 세례는 주지 않고 그에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미국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한 후 워싱턴의 한 목사에게 추천장을 써주었다. 그는 이승만을 미국으로 보내 워싱턴에서 명망이 높고 정치적으로도 인맥이 풍부한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하여 그의 정치활동의 든든한 뒷배가 되도록 하려는 깊은 배려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중에야 그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게일 목사의 조언대로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준비를 서두르게 된다. 

 

《뎨국신문》복귀하여 필화사건 불러

 

이승만은 출옥과 더불어 이종일의 배려로 《뎨국신문》에 다시 복귀하여 논설을 집필했다. 이것은 최근 투옥된 <뎨국신문>사장 이종일과 옥중에서 약속한 일이었다. 그들은 함께 출옥되었다.  《뎨국신문》은 이승만이 출옥하여 논설을 집필한 지 2개월 뒤인 1904년 10월 10일 주한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의해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다. 정간 이유는 10월 7일자 논설이 주한 일본 측에게 군사상․ 치안상으로 방해가 됐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식의 강제 신문 정간(停刊) 조치는 우리나라 신문사상 처음 당하는 것이고, 일본 측이 한국 민족지에 가한 최초의 직접적 언론 탄압이기도 했다. 이 문제를 일으킨 논설도 이승만이 집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인가? 

 

이승만은 출옥 3개월 후인 11월 4일에 대한제국의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의 밀사로 출국하게 된다. 그의 출국에 대해 《뎨국신문》은 “본사 사원 리승만 씨가 미국으로 떠났다”고 했고 《대한매일신보》도 “《뎨국신문》 주필하던 리승만 씨가 출국했다”라고 보도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승만 자신은 고종의 밀사설을 부인했다. 당시 민영환, 한규설 등이 고종에게 대한제국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누군가를 심어두어야 한다면서 가장 적격자가 이승만이라면서 그를 미국으로 밀파하도록 건의했다는 것은 사실로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고종이 시녀를 보내 자신에게 은밀한 면담을 제안해 왔지만 자신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 자서전에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만일 고종을 만났다면 이후의 처우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아쉬운 듯 한 말도 남겼다.

 

자력 유학이냐 밀사냐? 누구의 말이 맞을까? 고종은 일본의 반대 때문에 그를 공식적으로 미국 공사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밀사로 밖에 그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주의자 이승만은 일본이 주목하는 요 사찰 대상 1호였다. 그런데도 역사가들 사이에는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에 대한 미국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보낸 밀사라는 설이 유력하다.

 

당사자인 이승만은 민영환이나 한규설, 그들 중 한 사람이 미국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영환과 한규설은 자기들이 한국을 비울 입장이 못 되니 이승만이 대신 가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그의 가족을 책임지고 보살펴주겠다고 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나라를 위해 활동해 달라고 적극 권했다. 이런 떠밀림으로 그는 조속한 도미를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유학을 위해서도 미국에 가야 했었다. 그러나 도미 이후 그가 겪는 생활비 걱정들을 보면 밀사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이승만은 무려 19통에 달하는 외교문서와 선교사들의 추천서를 트렁크 밑창에 숨겨가지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에 그가 지니고 떠난 외교문서는 민영환과 한규설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 앞으로 써준 편지와 민영환이 주미공사에게 보내는 편지들이었다. 딘스모어는 1887년부터 2년 동안 주한 미국 공사로 와 있던 사람으로 민영환과는 매우 가까운 벗이었으며 당시 하원의원으로 미국 국회에 진출해 있었다. 이승만의 도미 경비를 한규설이나 민영환 그리고 지인들이 사비로 보탰다. 이것을 보면 고종의 밀사설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와이-샌프란시스코 거쳐 워싱턴으로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의 이승만.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위해 미국 서부지역 유학생들이 보내준 활동비 100달러로 외교관 복장을 마련했다.

이승만이 탄 배는 1904년 11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4,000여명의 한국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890년대 후반부터였지만 공식적인 이민은 1902년부터였다. 1902년 12월 27일에 제1진 이민 121명이 제물포항을 떠난 후 1905년 65차 선편까지 7,226명이 하와이로 이민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일본의 검열을 피하려고 가장 열악한 3등칸 승객이었지만 유일하게 특별대우로 24시간 하선을 허가받아 감리교 선교부의 와드먼 감리사와 윤병구(尹炳求) 목사의 환영을 받았고, 그들은 이승만을 한국인교회로 안내하였다. 윤병구 목사와는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교회에는 200명가량의 동포들이 모여 있었다.

 

그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4시간 동안이나 신앙 간증을 겸한 독립정신에 대한 연설을 했다. 이민 노동자들은 고국에서 온 그의 강연을 듣고 열광했다. 감격에 겨워 소리도 지르고 깊은 탄식과 더불어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들은 현장에서 주머니를 털어 선금을 모아 이승만의 유학 비용에 보태라고 기부했다. 이때에 심어준 감동적인 인상은 훗날 이승만이 하와이를 제2의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이승만을 평생 돌본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도 그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그날 저녁 윤병구 목사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밤을 세워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하는 러-일 강화회의에 대한 대책을 숙의했다. 윤병구는 이때부터 이승만을 곁에서 지키는 평생 지지자가 되었다.

 

이승만을 태운 사이베리아호는 12월 6일 오전 10시쯤에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은 까다로운 수속을 마치고 3시에 하선했다. 부두에는 안정수가 여러 사람들과 마중 나와 있었다.  안정수는 1902년 하와이 이민선의 통역으로 왔다가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 지역에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곳에서도 여러 차례 강연회를 가졌다. 그곳 교민들도 그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곳 미국 목사로부터 풀 스칼라십의 신학대학 유학 제의도 해왔다. 그는 그 고마운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거부했다.

 

워싱턴에서 헤이 미 국무장관 면담

 

그리고 12월 26일 오후 8시에 산타페 대륙횡단열차로 워싱턴으로 출발했다. 이승만은 1904년 12월 31일 오후 7시 워싱턴에 도착했다. 그는 조그마한 호텔에 방을 정한 후 게일과 언더우드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커버넌트 교회의 햄린 목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햄린 목사는 기대했던 만큼 그에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매우 엄격해 보이는 신사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절하기보다는 엄격한 성품의 햄린 목사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다음날 오찬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1905년의 새해 아침을 워싱턴 호텔에서 맞은 이승만은 눈을 뜨자 곧 한국 공사관을 찾아갔다. 공사관은 3층이었고 큰 방이 9개나 있었다. 당시에는 주미 공사가 없던 때여서 참사관 신태무(申泰茂)가 공사대리로서 일하고 있었다. 공사관에서 서기관 홍철수와 김윤정(金潤晶)을 만났는데 홍철수는 민영환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이든지 돕겠다고 말했다.

 

반면 신태무는 본국에서 훈령이 오기 전에는 보살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신태무는 엄비가 자신의 소생 이은(李垠:의친왕)이 제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미국 로어노크 대학에 유학 중인 이강(李堈:의친왕)을 감시할 목적으로 보낸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일은 의친왕 이강의 방탕한 행실을 헐뜯는 데만 전념하였다. 당시 김규식(金奎植)도 같은 학교에 유학 중이었다.

 

공사관을 나온 이승만은 어제 밤에 방문했던 햄린(Hamlin)목사를 교회로 찾아가 오찬을 함께 했다. 많은 대화를 나눈 햄린 목사는 이 오찬을 통해 자신이 이 젊은 청년 이승만의 뒤를 보살펴야할 인물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햄린 목사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이후 그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미국 동부의 백인사회에 접근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승만이 민영환에게 보낸 자필 한글 보고서.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의 소개장을 들고 딘스모어(Hugh A, Dinsmore) 하원의원을 찾아갔다. 딘스모어 의원은 오랜 친구들의 소식을 물으며 무척 반겨주었다. 이승만은 딘스모어를 통해 우선 존 헤이(John Milton Hay: 1838-1905) 미국 국무장관을 만날 수 있도록 부탁했다. 딘스모어는 기꺼이 이승만의 청을 받아들여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게 해주었다. 이승만은 헤이 국무장관에게 한국의 사정을 자세하게 설명한 후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의 ‘거중조정’ 조문에 따라 한국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는 이 사실을 고국의 민영환에게 타전했다. 아직은 일개 백면서생으로서 이승만이 미국의 국무장관을 만나 이런 약조를 받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이를 성취한 것이다. 여기에서 고종의 밀사로서 모종의 친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한참 후인 루스벨트와의 면담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밀사설이 부각된다. 이승만과 딘스모어는 그가 친한적(親韓的) 조치를 취해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그해 7월 1일 헤이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조지워싱턴대 장학생 유학

 

이승만은 자신의 유학 문제를 햄린 목사와 상의했다. 햄린 목사는 이승만을 한국 공사관의 법률고문을 맡고 있던 조지워싱턴대학교 총장인 찰스 니덤(Charles W. Needham)박사에게 소개했다. 니덤은 이승만에게 선뜻 선교장학금을 받도록 해주었다. 선교장학금이란 매학기 도서관 이용료 1달러를 제외한 학비 전액을 지원 받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이승만은 한국 및 중국 학문에 대한 폭넓은 실력을 인정받아 조지워싱턴대학교에 한 학년을 월반한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해주었다. 이것은 알렌 윌버 학장의 배려였다. 이런 가능성을 알고 한국의 연동교회 게일 목사는 이승만을 미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물론 다른 목사들도 미국 유학 추천서를 써주었지만 그것은 신학대학교에 대한 풀 스폰서십 추천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기대와는 달리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승만과 루스벨트의 면담

 

그가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 32대 대통령 루스벨트를 면담한 것은 1905년 8월 5일 뉴욕 교외 소재 ‘여름 백악관’에서였다. 물론 이 만남은 하와이 윤병구 목사의 주선으로 이루어졌으며 그와 함께 동행했다. 이승만과 윤병구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는 소문이 교포사회에 퍼지자 서부지역의 유학생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이승만을 유학생 대표로 선정하여 대표성을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동포들이 100달러를 모금해 보내주면서 활동비 연조로 사용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승만은 이 돈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때 입을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등 외교관 예복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워싱턴의 주미공사관에서는 이승만에게 정부 입장에서의 추천장 한 장도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벌써 일본 정부와 내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승만의 일거수일투족은 일본 정부에 고스란히 보고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와 이승만의 만남은 1905년 7월과 8월 사이 워싱턴 여름별장의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는 이미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다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맺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니 이승만의 한국독립에 대한 제안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언론인 손세일 씨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루스벨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외교정책의 기본 사상도 강한 나라는 번영하고 약한 나라는 멸망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00년 8월에 뉴욕지사로서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 이미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될 것이고, 지금까지 한 것으로 보아 그런 보답을 받을 만하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일본에 편향적이었다.’   

 

이승만은 루스벨트와의 면담을 계기로 제국주의 시대의 국제질서의 냉엄한 현실을 실감했다. 이후의 그의 행보는 기자로서가 아니라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로 바뀐다. 그러므로 본 신문사(新聞史)에서는 정치적 활동에 관하여는 언급할 영역이 아닌 것 같다. 다음 회에는 그의 유학과 가정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계속>

참고자료 손세일 저 <이승만과 김구>(나남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