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의 애정 편력] 사랑과 정복의 황제, 나폴레옹 ②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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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의 애정 편력] 사랑과 정복의 황제, 나폴레옹 ②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사랑과 정복의 황제였다.

 

부하의 부인과 불륜에 빠지다

결혼 한지 2년 뒤 나폴레옹은 이번엔 이집트로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이집트에서 그는 눈에 확 뜨이는 한 여인을 만난다. 바로 폴리느 포레라는 여인이었다. 포레 부인은 역시 프랑스에서 파병되어 와 있는 군인의 아내. 남편의 계급은 소위였다. 유부녀인 포레 부인의 나이는 꽃다운 20세. 포레 부인을 본 나폴레옹은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그녀를 자신의 애인으로 만들었다. 처음으로 연하의 여성에게서 느끼는 육체의 즐거움은 대단했다. 포레 부인이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뒤 그녀의 남편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파리로 귀환됐다. 물론 부인을 이집트에 남겨 두고.

나폴레옹의 애인이 된 포레 부인은 사령부 가까이 거처를 옮기고 ‘동방의 귀부인’이니 ‘장군 부인’이란 애칭을 들으며 나폴레옹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녀도 나폴레옹을 기쁘게 하는데 많은 정성을 기우렸다. 특히 몸에 찰싹 달라붙는 흰 판타롱 차림은 여성의 엉덩이 부분을 가장 사랑하는 나폴레옹을 미치도록 즐겁게 해 주었다. 허리와 엉덩이에 관한 감정가로도 명성이 높았던 나폴레옹은 한 번은 조세핀의 엉덩이를 이렇게 평했다.

“이 세상에서 상상이 가능한 한 가장 모양이 예쁘고 성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엉덩이다”

 

변덕스런 나폴레옹의 사랑놀이

나폴레옹과 포레 부인과의 사랑놀이는 부인의 남편이 다시 이집트로 돌아오면서 끝장이 났다. 포레 소위는 영국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영국군이 일부러 포레 소위를 풀어주어 이집트로 가게 했던 것이다. 아쉽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포레 부인의 품을 떠날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포레 부인이 사라졌다 해서 나폴레옹의 바람기도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폴레옹의 꾸준하면서도 변덕스런 사랑놀이 뒤에는 충실한 부하가 한 명 있었다. 15년 동안 나폴레옹의 심복이었으며 부관이었던 듀로크였다. 그는 나폴레옹의 여성 조달을 담당한 충실한 부하였다. 듀로크는 나폴레옹 궁의 한 침실에 밤에 불려갈 여자들을 대기 시켜 놓았다. 그리고 하루의 일을 마친 나폴레옹이 돌아와 언제 어디서 여자를 찾아도 곧 상대 할 수 있도록 나체로 침대에 누워 있도록 했다. 이런 여성들 가운데는 시녀들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에레놀이란 아가씨가 있었다. 에레놀도 몇 차례 나폴레옹의 즉석 섹스 상대자로 뽑혔었다. 그런데 에레놀이 덜컥 나폴레옹의 아기를 가졌다. 그리고 1806년 나폴레옹의 아들을 낳았다. 37세에 첫 아기를 가진 나폴레옹의 기쁨은 대단했다. 그는 정식으로 아버지가 되었음을 공포했다.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은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이었다. 나폴레옹이 상대했던 여인 가운데는 조르쥬란 여배우도 있었는데 그녀는 동성연애자이기도 했다. 그녀가 동성연애자인 상대 여성에게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털어 놓아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이 폭로되고 말았다.

 

나폴레옹 대관식 장면.

 

백작 부인을 가로채다

나폴레옹이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여인은 마리 와레프스카란 백작 부인이었다. 와레프스카 백작 부인은 폴란드 사람으로 폴란드 사람들이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바쳤던 예기치 않았던 선물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나폴레옹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시작이 됐다. 나폴레옹의 침실로 연행되어 온 섬세하고 젊은 백작 부인은 나폴레옹이 불문곡절하고 동물적인 욕망을 보이면서 달려들자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백작 부인이 기절한 것도 상관없이 그녀를 강간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의식이 깨어난 그녀는 나폴레옹을 용서해 주었고 그 뒤 3년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되었다. 그녀의 조용하고 헌신적인 태도가 나폴레옹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이 때문에 와레프스카 백작 부인은 나폴레옹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진실로 우러나는 사랑을 나눈 오직 한 사람의 여성이었다.

 

아이를 갖지 못한 조세핀과의 결혼 생활은 황량하기만 했다. 그리하여 1810년 결국 나폴레옹은 조세핀과의 결혼을 취소하고 말았다. 결혼한 지 12년 만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백작 부인에게서 두 번 째의 아들 알렉산드르를 얻었다. 이번에도 나폴레옹의 기쁨은 대단했다.

 

두번째 결혼

조세핀과 이혼한지 얼마 안 있어 나폴레옹은 두 번 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엔 약간의 정치적인 요소도 있었다. 상대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 마리 루이스 공주였다. 결혼 할 당시 공주의 나이는 이제 겨우 18세. 루이스 공주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동물이라도 수컷은 일체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 완벽한 규중 처녀였다. 정식 부인에게서 자녀가 없어 후계자가 없는 나폴레옹에게 새 신부는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존재였다. 다행스럽게 이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루이스 왕비는 결혼 하자마자 곧 아들을 낳았다. 이 아들 때문일까. 나폴레옹은 새 아내에게 많은 애정을 쏟아 부었다. 결혼 중에 나폴레옹은 외국으로 많은 원정을 떠났는데 그때마다 아내에게 아주 간절한 편지를 띄웠다.

"단 하루도 그대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소. 단 하룻밤도 그대를 내 팔에 끌어안지 않은 적이 없소. 어떤 여인도 그대만큼 큰 헌신과 열정, 자상함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공감과 사랑, 진정한 감정으로 묶인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오.”

또 어떤 편지는 정열이 너무 넘치고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낯을 붉히게 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대의 탄력 있고 부풀은 가슴에, 그리고 다시 아래로, 그리고 또 훨씬 그 아래에 사랑의 키스를 보내오.”

“그대의 작고 앙징스런 숲에 나의 키스를-”

 

 

통일 유럽의 꿈을 가슴에 묻고

그러나 프랑스 황제의 용상에 앉았던 나폴레옹도 차츰 황혼의 그림자 속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특히 1812년 74만 대군을 거느리고 모스크바 원정을 갔다가 패하자 나폴레옹의 사기는 하루아침에 꺽이고 말았다. 결국 1814년 45세 때 연합군에 붙잡혀 엘바섬으로 귀양을 떠났다. 그러나 이듬해 루이 18세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극적으로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나와 권력을 다시 잡았다. 그러나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에서의 대패로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됐다. 평생을 여인들의 가슴을 옮겨 다니며 살았던 나폴레옹도 49세를 넘기면서 이성에 대해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국왕에서 쫒겨 나고 귀양에 대한 충격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병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러저러한 많은 병에 걸려 남성으로서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섬으로 쫒겨난 지 5년만인 1821년 5월 5일 나폴레옹은 통일 유럽의 꿈을 영원히 가슴에 묻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5년을 영국 왕실에 의해 구속된 채로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부검 결과 사인은 위암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그의 사인은 상당한 논쟁을 일으켰다. 일부 학계에서는 비소 중독설도 제기되었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그가 죽은 지 19년만인 1840년 5월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로 반환 되었으며 현재 파리의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내 키는 땅에서 재면 가장 작지만 하늘에서 재면 가장 크다.’‘내 비장의 무기는 아직 내 손안에 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다.’‘승리는 가장 끈기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

모두 나폴레옹이 남긴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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