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代로 돌아간 대마도 추억여행①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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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代로 돌아간 대마도 추억여행①

대학동창생 14명이 빚어낸 한 편의 멋진 드라마였다. 이보다 더 멋지고 뜻 깊은 여행은 드물 것이다.

 

너와 나가 아닌 오직 우리만 있었던 3

일흔을 눈앞에 둔 저마다의 마음엔 어느새 꿈과 낭만만 먹고 살았던 20대 시절의 추억들로 가득했다. 그때 간직했던 그 꿈과 낭만들은 50년 가까운 세월의 벽을 지나왔건만 아직도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조국의 아픈 현실을 보며 아파했고 밝고 멋진 미래의 조국을 향한 예리한 통찰력도 그때처럼 그대로 번뜩였다.

이들은 한없이 펼쳐지는 현해탄의 푸른 해원과 하늘이 안 보일 만큼 울창한 대마도 숲길을 보며 자연인으로써의 탄성도 질렀다. 그리고 선인들의 혼이 담긴 곳에서는 머리 숙여 그분들의 높은 뜻을 새겼다. ‘너와 나’가 아닌 ‘오직 우리’만 있었던 3일간의 멋진 20대로의 추억여행에서 모두 만족과 즐거움만 한 아름씩 안고 돌아왔다.

 

초등학교 소풍 길의 설렘처럼

지난 6월 29일 오후 3시 서울역에서 KTX열차를 탔다. 고향이 남쪽인 까닭에 나는 경부선 열차만 타면 가슴이 설렌다. 단지 고향근처를 통과할 뿐이었지만 남행열차만 타면 항상 그랬다. 그러나 이번의 남쪽 나들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기다려지고 가슴이 설렜다. 대학동기생 14명이 대마도여행을 위해 부산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소풍 길의 설렘도 이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열차는 2시간 45분 만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가까운 곳을 돌아보려던 생각은 때마침 쏟아지는 비 때문에 접었다. 대신 동기회에서 예약해 둔 숙소에 체크인 하는 걸로 공식 대마도 여정을 시작했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맞으며 친구들은 부산역 맞은편 차이나타운의 중국 음식점에서 푸짐한 요리와 한 잔의 술을 곁들여 옛 추억을 더듬었고 새 추억거리를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을 시작했다.

신국제여객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창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다음날 아침 서둘러 부산항 신국제여객터미널로 갔다. 거기서 만난 여행사의 가이드는 훤칠한 키에 정감 넘치는 부산사투리를 사용하는 50대 중반 아줌마였다.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돛대기 시장처럼 붐비는 출국장을 벗어나니 400명 이상을 태운다는 쾌속여객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배는 짙은 안개로 사방이 하얗게만 보이는 현해탄을 달려 2시간 10분 만에 우리들을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내려주었다. 이래서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했을까? 입국장을 꽉 채운 사람들의 대부분이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어서 외국이란 실감이 안 났다. 다만 입국심사 때 얼굴 사진과 양손 검지손가락 지문까지 찍을 때는 국경을 벗어났음을 실감했다.

 

신들이 지배하는 나라

세관을 나온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로 이즈하라 시가지를 20여 분 걸어서 식당으로 갔다. 간단하고 깔끔하게 개인별 식판에 차려져 나온 일본식 밥상이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어 주었다. 이즈하라는 깨끗하게 가꾸어진 작고 조용한 곳이다. 우리들은 걸어서 시내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보이는 사람은 겨우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대마도 전체 인구가 고작 3만5천 명 정도라니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만 신사나 유적지 등 관광명소엔 사람들이 좀 보였지만 그들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다.

가이드는 우리들을 인솔해 하치만궁(八幡宮)이나 수선사에 들려 유래를 설명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거기엔 임신한 몸으로 한국의 삼한을 정벌했다는 신공황후나 임진왜란 때 한국을 침략한 고니시 유끼나와(小西行長)의 딸 마리아의 위패 등을 모신 곳이라 한다. 일본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적국의 명장이라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죽으면 신으로 받들어 진단다. 그들이 죽어서라도 자기들을 해칠까봐 그렇게 모신다니 어이가 없다. 그처럼 많은 신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스며있는 나라가 일본이란다. 그래서 일본은 각종 신들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덕혜옹주 결혼봉축비(왼쪽), 최익현(崔益鉉) 선생의 순국비(오른쪽)

 

한국과 일본 사이의 애증의 세월

이어 우리들은 신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지만 일본의 유명한 문학가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 1860-1926)의 생가에 마련된 기념관에도 들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도 살았던 그는 아사히신문 최초의 한국특파원이자 아사히신문에 춘향전을 연재로 소개한 친한파 소설가이자 기자였다. 토스이와 24세에 요절한 유명한 여류소설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와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외국인인 우리의 마음까지도 울린다. 그녀는 일본화폐(5,000엔권)에 인쇄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엉뚱한 오해에 의한 비극적 결별이었기에 이를 후세 사람들은 ‘이치요의 오해’라고 했다.

이어 들린 고려문터에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흐르는 애증의 세월을 읽을 수가 있었다. 고려문은 2014년 다른 곳으로 이설돼 지금은 계단의 터만 남았는데 그 터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서 있었다. 일본인들은 오래 전 선진문화를 전해주던 조선통신사 행렬을 성대히 맞이하기 위해 그 문을 세웠다. 특히 그 고려문은 임진-정유재란의 기간에 세워진 친선교류의 문이어서 더욱 역사의 모순을 느끼게 해 주었다. 또 그 부근의 금석성안에 있는 비운의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옆에는 무궁화 꽃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었다. 망자에 대한 배려인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반성에서 심어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즈하라항에서 기념사진(왼쪽) 조선통신사비(오른쪽)

수선사 경내 묘역에 있는 최익현(崔益鉉)선생의 순국비는 망국의 한을 품은 선생의 설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일제침략에 저항하다 체포돼 유배됐던 대마도에서 병으로 돌아가신 선생의 시신은 사흘간 이 절에 안치됐었다고 한다. 이를 인연 삼아 순국한지 80년이 지난 1986년에 한일 유지들이 세웠다는 얘기가 더욱 우리를 숙연하게 했다. 또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는 17세기 일본인 역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蒡洲, 1668-1755)의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비석이 있다. 崔益鉉선생비석을 세운 양국유지들이나 친한파 소설가, 선린지교를 강조한 역관의 뜻처럼 두 나라의 국민들이 사이좋게 살아갈 날은 없을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일 두 나라와 민족 사이를 흐르고 있는 애증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우리들 14명은 이즈하라를 떠나 대마도의 최북단을 향해 달렸다. 우리들의 이번 추억여행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이때 만들어졌다.

추억여행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