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보다 무서운 전염병 창궐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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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보다 무서운 전염병 창궐

1594년 갑오년 들어 이순신(李舜臣)의 한산도 진영에 전염병이 돌았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을 따라 다니는 피난민들과 포로들도 전염병의 창궐(猖獗)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혹한 지옥도

조선강토는 왜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해 콩가루가 되어버렸다. 백성과 군사들의 시체와 말의 사체가 여기저기서 썩어갔고 마땅한 소독약이 있을 리 없었던 상황에서 전염병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게다가 피죽도 못 먹어 영양실조에 걸린 백성들은 누렇게 떴다. 그러니 전염병에 걸렸다 하면 영락없이 죽어나갔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혹한 지옥도가 연출되었다.

전염병 창궐로 고뇌하는 이순신. 사진=KBS 징비록

전염병에 관한 각종 기록

1594121일 난중일기 “한산도 본영의 격군(格軍 노꾼) 742명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먹였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대형 노를 저어야 하는 격군들은 고생이 무척 심했다. 갑판 위에서 전투를 하는 병사들과 달리 이들은 선장의 명령에 따라 동서남북, 전후좌우로 방향을 틀면서 노를 계속 저어가야 했다. 이날 저녁에는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悰)이 와서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 274구의 시체를 묻어주었다는 보고를 했다.”

4월 20일 기록에 따르면 조선수군이 전염병에 의해 궤멸될 처참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삼도수군 1만7천명 가운데 사망자가 1천904명, 감염자는 3천759명으로 도합 5천663명의 전력손실이 있었다. 사망자는 전라좌도가 606명, 앓고 있는 자가 1천373명, 전라우도 사망자는 603명, 환자는 1천878명, 경상우도는 사망자가 344명이고 환자는 222명, 충청도는 사망자가 351명, 환자가 286명으로 하삼도의 사망자는 도합 1천904명이고 환자는 3천759명이었다.

4월 3일 이순신은 3도 군사들에게 위로주로 술 1천동을 내려 먹였다. 잘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에서 전염병에 걸리면 그만 나동그라졌기에 때문에 술과 안주를 푸짐히 먹인 것이다. 이순신은 순천, 광양, 보성, 강진, 해남, 진도 등 고을 수령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정성을 다하여 보살피라고 지시했다.

수로에 능했던 어영담도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여수 이순신광장. ©김동철

4월 10일 이순신이 가장 아끼던 조방장 어영담(魚泳潭 1532~1594)도 전염병으로 세상을 떴다. 광양현감이었던 어영담은 다도해의 복잡한 물길을 훤히 꿰뚫고 있어 이순신으로부터 조방장으로 임명됐고 수로향도(水路嚮導)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이다. 거제, 옥포, 당항포 해전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순신은 한 팔이 잘려나간 듯 그의 죽음에 통곡했다.

광해군이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모습. 사진=KBS 징비록

전염병으로 군사와 백성들이 나날이 줄어들자 이순신은 조정에 의원을 보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4월 24일자 청송의구려장(請送醫救癘狀)이다.

“3도 수군이 한 진에 모여 있는 상태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전염병이 크게 돌았는데 약품을 많이 준비하여 백방으로 치료해보았지만 병이 나은 자는 적고 사망자는 극히 많습니다. 무고한 군사들과 백성들이 나날이 줄어들어 많은 전선을 움직이기 어렵게 되었는데 위태롭고 급한 때를 당하여 참으로 답답하고 걱정됩니다. 조정에서는 사정을 십분 참작하시어 유능한 의원을 특명으로 내려 보내어 구호하도록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그러나 유명한 의원이 내려왔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도 역병에 걸려

자신의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하인 김산(金山)과 그 처자 등 3명도 전염병으로 죽었다. 군사와 피난민, 포로 등이 전염병으로 연달아 죽어나가자 이순신은 황망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역병에 걸려 사경(死境)을 헤맸다.

425 “새벽에 몸이 몹시 불편하여 하루 종일 앓았다.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이 와서 보았다.”

426 “병세가 극히 중해져서 거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은 돌아갔다.”

429 “기운이 쾌차해진 것 같다. 오늘 우도(右道)에서 삼도의 군사들에게 술을 먹였다.”

51 “하루 종일 땀이 퍼붓듯이 흘렀다. 기운이 쾌해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葂)이 들어왔다.”

57 “몸이 편한 것 같다. 침을 열여섯 군데나 맞았다.” 이순신은 여러 날 통증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

59 “아들 면과 집안 여자 하인 4명, 본영의 여자 하인 4명이 간호하러 들어왔다. 덕(德)이만 남겨두고 모두 돌려보냈다. 발포만호 황정록이 떡을 만들어 와서 위로하였다.”

장모의 제삿날이 다가왔기 때문에 아들 회와 면, 여자 하인들을 다 보낸 것이다.

729 “종일 실비가 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끙끙 앓느라 밤을 새웠다.”

이같이 몸이 불편하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은 7년의 난중일기 가운데 180여 회나 나온다.

 

무쇠와 같이 강건할 것만 같았던 무인(武人) 이순신은 사실 몸이 그렇게 튼튼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행히 이순신의 몸은 쾌유됐지만 아들 면이 전염병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했다. 피를 토하는 증세까지 있다고 하므로 본영(여수)에 둘째 아들 울을 보냈다. 며칠 후 조카 해와 하인 경이 들어와서 아들 면의 병이 차도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병신년 1596318 “밤에 식은 땀이 등을 흠뻑 적셨다.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 몸이 몹시 좋지 않았다.”

1596321 “초저녁에 곽란이 나서 한참이나 구토를 했는데 자정이 되어서야 조금 가라앉았다.”

정유년 159711 막내 면이 전사한 후에는 코피를 되로 쏟았다는 기록이 있고 속이 불편해서 설사를 했다는 기록도 여럿 남아있다.

 

전사자와 병사자로 인구 크게 줄어

전염병은 왜적보다도 더 무서운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577년(선조 10)에는 백성이 462만 명으로 호적수에 나왔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사를 하였을 때는 153만 명으로 엄청 줄었다. 전사자와 병사자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음을 알 수 있는 자료다.

1595년 2월 12일 도원수 권율(權慄)은 삼남의 육군과 수군을 조사했는데 그 가운데 수군은 큰 배와 작은 배가 도합 84척이고 사군과 격군은 도합 4천109명으로 이 가운데 환자가 절반을 넘는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갑오년 1594년 초 수군 1만8천500명에 비하면 엄청난 수가 사라진 것이다.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수군을 싹 쓸어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왜군 또한 전염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병참선이 무너지는 바람에 본국과 통신이 두절되다시피 했고 식량의 공급마저 끊겼다. 그리고 전염병이 돌자, 부득이 남해안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염병과 관련, 극악무도한 행위가 민간에서 행해졌다. 중종 때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평안도 지방이 극심했고, 충청도, 전라도 등지를 휩쓸었다. 1576년(선조 9) 6월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케 했다. 이유는 서울 안팎의 사람들이 창질(瘡疾)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간(肝)과 쓸개(膽)로써 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흉악한 무리들이 어린이를 사람 없는 곳에서 유괴했고, 혼자서 길을 가는 여성들을 겁탈하여 배를 가르고 쓸개를 탈취하여 비싼 값에 팔았다. 시골에서는 나무숲에 결박되어 배가 갈라진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수신이 홀로 고뇌하는 모습이 오버랩되는 한산도 수루. ©김동철

이순신 장군이 직접 지은 제문(祭文)

1595년 7월 14일. “늦게 개었다. 군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에게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고 쌀 두 섬을 내어주었다.”

이날 장군은 을미년(1595년)에 죽은 군졸들을 제사 지낼 제문(祭文)을 지었다.

 

친상사장(親上事長)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며

이진기직(爾盡其職) 그대들은 맡은 직책 다하였건만

투료연저(投醪吮疽)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

아핍기덕(我乏其德)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노라

초혼동탑(招魂同榻) 그대들의 혼을 한 자리에 부르니

설전공향(設奠共享) 여기에 차린 제물을 누리시게나

 

여기서 투료연저(投醪吮疽)는 ‘술을 강물에 쏟아 붓고 종기를 빨았다’는 뜻이다. 투료(投醪)는 적은 양의 술을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다 같이 마시기 위해서 강의 상류에 쏟아서 같이 마시게 했다는 설화로, 춘추전국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후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과정에서 나온 고사(故事)다. 또 연저(吮疽)는 부하 병사들의 종기를 자기 입으로 직접 빨아줌으로써 부하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게 했다는 주나라 장수 오기(吳起)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순신 장군은 제문을 지을 때 이 두 가지 고사를 빌려와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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