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新)가장론] 2 라면과 커피는 남이 끓여줘야 더 맛있다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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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新)가장론] 2 라면과 커피는 남이 끓여줘야 더 맛있다

주변에 흔한, 그래서 누구나 손쉽게 즐기는 게 라면과 커피입니다. 그런 만큼 라면과 커피를 해 먹는 데는 각자 독특한 방식이 있죠. 라면은 종류만 수십가지 될 듯싶고, 같은 제품이라도 식성에 따라 달걀, 치즈, 콩나물 등 다양한 부재료를 넣어 끓여먹습니다.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짜파구리’가 유행하면서, 기존 조리법을 무시하고 제품을 재창조해 즐기는 소비자, 곧 ‘모디슈머(Modify+Consumer)’가 각광을 받기도 했죠.

커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판기 커피’가 최고라며 집에서도 봉지 커피를 여러 개 풀어 진하게 마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정한 원두커피를 따로 구해 직접 내려먹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자, 그럼 라면과 커피를 해먹는 그 많은 방식 가운데 어떤 라면과 커피가 가장 맛있을까요? 정답은 뻔합니다. 남이 끓여준 라면, 남이 타 준 커피입니다.

라면(크기변환)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남이 끓여준 라면이 최고랍니다. ⓒPiyato/Shutterstock

라면 끓이는 게 뭐 대수입니까

아내가 밤늦도록 공부를 하거나 TV를 보는 날이 자주 있습니다. 중간중간 지켜보면 출출해 하는 게 느껴집니다.

“라면 끓여줄까? 아니면 밥상 차려줘?”

물어 보면 아내는 반색합니다. 때론 “내가 직접 해먹을게요” 하지만, 라면 끓이는 게 뭐 대수입니까. 그냥 TV 보라면서 해다 줍니다.

아들 딸이 냉장고 문을 열고 망설입니다. 뭔가 먹고는 싶은데 마땅한 게 없다는 뜻이죠. “라면 끓여줘?” “만두 삶아줘?” 합니다. 가끔 딸년은 “햄버거 먹고 싶어”라고 대답합니다. 나가서 사다 줍니다. 일부러 산보도 가는데요 뭐.

오래전 ‘천국과 지옥의 차이’라는 이야기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식사 시간에 상차림은 같습니다. 수저 또한 같은 걸 사용합니다. 다만 그 수저는 매우 길고, 끄트머리를 잡아야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사람들이 그 수저로 음식을 집어 남의 입에 넣어주기에 원하는 대로 배불리 먹습니다. 반면 지옥에서는 그 긴 수저를 제 입으로만 가져가는 바람에 결국 식탁에 차린 진수성찬을 하나도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은 행복하고 ‘지옥의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나랑 살면서 그것도 못해?”

지난 기사에서 제 가장훈이 ‘힘든 일은 내가 한다. 귀찮은 일도 내가 한다’라고 밝혔죠. 사실 힘든 일을 가장이, 남자가 하는 건 당연합니다. 물리적 힘을 쓸 일을 아내, 딸에게 맡기겠습니까? 돈 벌어 가족 먹여 살리는 일도 대개는 가장이 주도합니다.

문제는 귀찮은 일입니다. 살림에는 귀찮은 일 투성입니다. 그 귀찮은 일을 내가 먼저 하면 나머지 식구는 안 해도 됩니다. 가족을 편하게 해 주는 일, 가장 아니면 누가 합니까.

그럼 저만 처자식에게 일방적으로 봉사할까요? 몇 해 전 아내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원고 마감 시한은 다가오는데 글은 진도가 나가지 않고, 담배마저 달랑달랑했지요. 마침 외출한 아내 생각이 나 전화했습니다. 들어오면서 담배 한 갑 사오라고. 상냥하게 대답한 아내가 막상 집에 들어설 때는 뾰로통했습니다. 함께 있던 친구들이 대화 내용을 듣고는 “너는 남편 담배 심부름도 하냐?”라면서 한심해 하더라는 겁니다.

빙긋 웃으며 한마디 했습니다. “나랑 살면서 그것도 못해?” 아내는 금세 미안한 빛을 띠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해주는 것들이 생각난 모양이지요. 우리 집 아이들, 심부름 잘합니다. 제가 저희들 궂은 일 알아서 해주는데 저들이 애비 심부름 안하겠습니까. 우리 집에선 라면이 먹고프면 혼잣말처럼 “아, 라면 먹고 싶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옆에서 알아듣고 끓여줍니다. 라면은, 남이 끓여 줘야 가장 맛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용원(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이용원(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모든기사보기

서울신문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논설위원을 지냈다. 현재 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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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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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리언파더 2015-10-29 11:28:55

    '내 것'만 챙기는 것보다 다른 사람도 챙길 줄 아는 여유가 보기 좋습니다 ^^ 저도 실천해야겠어요!

  • 리나리 2015-09-11 09:13:02

    멋집니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읽었습니다 😊 제가 가장은 아니지만, 사람사이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적용될 점이 있네요☺️

  • V.J 2015-09-10 22:21:30

    얼마전 본 웹툰에서 여자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던 말이 생각납니다. 보통 살림, 요리는 아내의 몫이어서 아내라면 따뜻한 집밥을 해 줄것 같지만 정작 여자들도 그런 아내같은 존재가 필요하다는 요지였죠. 누군들 대접받고 싶지 않겠어요^^ 가장 아내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해준다고 생각하는 점이 바로 진정한 신가장론 출발이군요.

  • 구름을 벗삼아 2015-09-10 13:01:21

    역시 인자십니다..^^

  • 채리모 2015-09-10 12:43:22

    항상 남이 타준 커피가 젤 맛있다고 생각은 했으면서도 제가 다른 사람에게 타 줄 생각은 감히 못했네요. 새기고 실천해보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