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기억과 흔적] 장종훈의 굳은살에 새겨진 연습생 신화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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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기억과 흔적] 장종훈의 굳은살에 새겨진 연습생 신화

장종훈손
새벽까지 한 혹독한 스윙 연습으로 손바닥 전체에 굳은살이 박인 장종훈의 손. ⓒ이호근

연습생 신화, 기록의 사나이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 훈련 모습에 반해 4학년까지 했던 유도를 버리고 5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한 소년 장종훈. 세광고등학교(청주 소재)를 졸업한 후에 고졸 신분으로 프로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1986년, 그는 정식으로 선수 등록도 되지 않은 연습생(지금의 신고선수) 신분으로 빙그레 이글스에 들어간다. 연봉은 300만원이었다. 누구 하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프로야구를 뒤흔들 ‘장종훈의 고졸 연습생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한때 그는 고졸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한 인터뷰 기사가 이 사실을 알려준다.

사실 난 대학에 가고 싶었어요. 나중에 아이들한테 대학 나온 아빠로 기억되길 원했거든요. 그런데 나마저 대학을 가버리면 그동안 날 좋아하고 열렬히 응원을 보냈던 고졸 출신들한테 바로 상처 주는 일이 되잖아요. 결국엔 대학 가는 걸 포기하고 고졸 출신들의 우상으로 남기로 했죠.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_ <일요신문> 2005년 7월 3일자

1987년 4월 14일 열린 해태 전에서 유격수 이광길 선수의 부상으로 장종훈은 3번 타순으로 기용된다. 첫 타석에서 그는 시원한 2루타를 터트렸다. 전설의 서막이었다. 2005년 9월 15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KIA 전(2타수 무안타 1삼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기까지 개인통산 ‘출장 1950경기, 타율 0.281, 타점 1145점, 안타 1771개, 홈런 340개’의 기록은 한국 프로야구 전설로, 한화 이글스의 프랜차이즈 선수로 남기에 충분한 흔적들이었다.

1990년 28홈런으로 유격수 최초의 홈런왕이 되었으며, 1992년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시즌 41개 홈런을 치며 ‘마의 40홈런’ 벽을 깼다.

타격 부문의 탁월함은 그의 기록에서 잘 드러내고 있다. 1990년 타격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 1991년 타격 5관왕(홈런, 타점, 득점, 안타, 장타율), 1992년 타격 3관왕(홈런, 타점, 장타율)을 차지했다. 1991년과 1992년에 2년 연속 정규리그 MVP로 선정되기 충분한 성적이었다. 그가 1991년에 수립한 한 시즌 100타점과 100득점, 150안타, 35홈런, 240루타, 사사구 90개는 한국 프로야구사의 기존 기록을 몽땅 갈아치우는 것이었다.

프로야구 시즌 피날레라 할 수 있는 골든글러브도 5차례나 수상하였다. 특히 1991년 제1회 대회로 열린 한일프로야구슈퍼게임 5차전에서 장종훈이 때린 홈런은 나가라가와 구장 개장(1991년 4월 1일) 이래 첫 장외홈런으로 비거리가 160m나 되었다. 공이 떨어진 곳에는 기록의 흔적인 ‘기념비’가 세워졌다. 현해탄 너머 일본에까지 장종훈이라는 이름을 확실히 새긴 것이다.

 

오뚝이처럼 부활하는 노력의 화신

1993년 시즌에 접어들면서 부상과 슬럼프로 부진을 면치 못하지만 1995년 시즌에 타율 0.326, 홈런22개로 보란 듯이 부활한다. 장타율과 출루율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한다. 그는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더 독하게 자신을 훈련과 연습의 장으로 내몰았다. 장종훈의 투혼에 맞장구를 치며 도와준 선배도 있었다. 재일교포 출신 고원부 선수다. 그들은 건물 옥상에서 늦은 밤부터 새벽 3시까지 스윙 연습을 했다. 남들이 잘 시간에 이를 악물고 손 마디마디가 짓무르도록 방망이를 휘돌렸다.

그래서 그의 손바닥에는 물집이 마를 날 없고 굳은살이 점점 더 손 전체로 퍼져 나갔다(그림 참조). 전설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피나는 연습과 훈련이 있었기에 고졸 연습생이 신화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장종훈과 악수를 해본 사람들은 나무껍질 같은 그의 손을 기억한다. 그들은 이야기한다. 그런 손이기에 최초의 기록들을 숱하게 만들어 냈으리라고 말이다. 또 이런 노력파에게 누가 악담을 퍼부을 수 있을까?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자신감을 가져라.”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선배들의 칭찬도 장종훈에게는 좋은 영양제가 되었을 것이다.

 

감동을 주는 남자

그리고 인간 장종훈을 본다. 1999년 7월 10일 쌍방울 전에서 그는 김원형 선수가 던진 2구를 받아쳤다. 타구는 투수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김원형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경기는 계속됐고 내야안타가 될 순간이었다. 장종훈은 1루로 뛰어간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진 김원형 투수한테로 달려갔다. 그는 아웃됐다. 그 때문에 타율도 1위에서 3위로 밀려났다. 만약 그가 1루 베이스를 밟았다면 우린 인간적 감동을 맛보지 못했을 것이다. 김원형 선수는 그 후로 타석에 들어선 장종훈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손해가 결국엔 많은 사람들에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큰 울림으로 우리들 가슴에 깊이 새겨진 것이다.

장종훈은 현재 29년 간 몸담았던 ‘독수리군단(한화)’을 떠나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던 ‘갈매기군단(롯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롯데 간판스타 강민호의 부활은 물론 롯데 팀에 생기를 불어넣어 2015년 한 해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우연일까? 지금 한화와의 5위 순위 싸움이 박빙이다. 한화가 꼴찌를 계속 하면서 장종훈은 심한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한화의 영원한 레전드로서 자괴감마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둥지를 떠나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좋은 지도자로 거듭나길 바란다.

선수로 20년, 코치로 10년의 야구 인생을 살아온 장종훈은 ‘레전드’라는 말을 아직도 부끄러워한다. 등번호 35번 영구 결번을 자랑스러워한다. 야구의 꽃 홈런왕이 좋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피나는 연습으로 굳은살 박인 손이야말로 레전드 장종훈의 진면목일 것이다. 노력과 열정은 배신하지 않는다. 어느 날, 어떤 팀 감독이 되어 그라운드를 호령할 그를 꿈꾸어 본다.

주간 잡지 <주간야구> 1992년 4월 1일 통권255호 표지를 선동열 선수와 나란히 장식한 장종훈 선수. ⓒ이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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