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② 수성동계곡과 기린교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② 수성동계곡과 기린교

현재의 수성동계곡 전경 ©강기석
현재의 수성동계곡 전경. ©강기석

중인의 거주지, 왕족의 땅

최근 서촌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다고 한다. 서촌 일대는 서울경찰청 인근 내자동에서부터 사직동, 누상·누하동, 통의동, 효자동, 옥인동 등을 거쳐 멀리 창의문이 있는 부암동에 이르는 경복궁 서쪽 지역을 이른다. 조선 중기 영·정조 이래 중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아서 서민들의 거주지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원래는 조선 왕족이 독차지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자식들이 서촌 땅을 널찍하게 차지하고 웅거했다.

자하문로에서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우리은행 골목길 초입. ©강기석

태종 이방원이 차지한 땅은 ‘준수방’이라고 했다.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200m 정도 가면 우리은행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자하문로 넓은 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비스듬히 난 골목길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은행을 꼭지점으로 하고 한참 더 올라가서 통인시장 후문에 이르러 다시 오른쪽 자하문로에 이르는 삼각형 땅이 ‘준수방’이다. 이 땅 어딘가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났다.

이 지역이 태종 이방원의 잠저로 세종대왕의 탄생지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강기석
이 지역이 태종 이방원의 잠저로 세종대왕의 탄생지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강기석

이방원의 집터가 삼각형이 된 것은 자하문로와 이 골목길이 원래는 모두 북악산과 인왕산 등에서 흘러와 청계천으로 가는 개울이었는데, 우리은행 지점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이 넓은 땅에 가로 세로 40~50m에 이르는 연못을 파고, 인왕산을 후원 삼아 살았다고 한다. 그는 1398년 바로 여기에서 거병해 바로 윗동네 옥인동 일대에 살던 배다른 동생 방번, 방석을 죽였다(제1차 왕자의 난).

우리은행을 꼭지점으로 하고 통인시장 정문과 후문을 아우르는 삼각형 땅이 옛날 ‘준수방’으로 불렸다는 것을 지금도 기억하는 카페 주인. ©강기석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길

지금은 멋진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는 통인시장 후문에서 왼쪽으로 꺾인 골목길이 수성동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S자 형태로 계속 휘어지는 구절양장인 골목길 역시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었다. 지금은 윤동주 시인이 잠시 살던 집과 박노수미술관이 골목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던 영·정조 시대의 이 자리는, 글 좀 아는 이들의 단골 시회(詩會) 자리로 인기가 있었을 만큼 계곡과 숲, 바위가 어우러진 절경이었다고 한다.

수성동계곡 모습. 중앙의 돌다리가 기린교다. ©강기석

이 길의 끄트머리가 수성동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은 1971년 옥인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망가졌으나 불과 7년 전인 2008년부터 시작된 인왕산공원화계획 덕분에 간신히 옛 모습을 찾아 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린교가 특히 반갑다. 이곳에서 옛 선조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뭐든지 때려부수는 것을 능사로 삼는 사람들이 이곳에다 아파트를 짓고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기린교만은 무작스럽게 때려 부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복원되기 전 옥인아파트로 덮인 수성동계곡. ©강기석
폐허처럼 버려져 있던 옛 기린교 모습. ©강기석

핏빛 역사가 숨은 절경

기린교는 1751년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간송본) 가운데 ‘수성동(水聲洞)’ 편에도 등장한다. 최소 260년 전 구조물인 셈이다. 어쩌면 원래 이곳에서 안평대군(1418~1453년)이 살던 때 세워졌을지도 모른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기린교 왼쪽 언덕 위, 지금은 말라버린 폭포 옆 평평한 곳에 ‘비해당(匪懈堂)’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1447년 4월 어느 날 이곳에서 자다가 꾼 꿈을 안견에게 설명하고 그리게 한 그림이 세종 때의 문예부흥기 분위기를 전하는 걸작 ‘몽유도원도’(일본 덴리대 소장)다.

안평대군은 권력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문화계의 후원자 역을 자임했다. 그러나 삼촌·조카 사이의 권력 다툼이 만들어낸 거친 피바람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바로 윗형인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한 후 안평을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렸다. 안평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이후 비해당을 차지한 것은 뜻밖에도 안평대군의 삼촌이자 세종대왕의 둘째 형 효령대군(1396~1486년)이었다. 효령은 이곳에서 33년을 더 살아 90세까지 장수했다.

지금은 말라버린 수성동계곡 폭포. 이 근처 어딘가에 ‘비해당’이 있었다. ©강기석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간송본)’ 중 ‘수성도’. ©강기석

후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곳 집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왕산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의 옛 집터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

복원 중인 수성동계곡을 둘러보면서 기린교를 중심으로 옛날의 절경을 상상해 보는 동시에 이곳을 거쳐 갔던 이들의 사연도 한번 떠올려봄직하다. 다리 너머로 흐르는 역사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