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와 닮았었던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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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와 닮았었던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10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에서 부안군 격포항까지 운항하는 110t급 서해훼리호가 침몰하면서 29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20여 년이 지났는데도 세월호 사고로 다시 인재가 반복되는 걸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과거의 사고 취재 상황을 돌아본다.

 


 

#1 사고 현장으로 출동

KBS 보도국 특별취재팀이 꾸려졌다. 당시 사건 사고 담당 차장이었던 필자는 펜기자, 촬영기자, 영상편집기자와 차량 3대에 나누어 타고 변산반도로 급히 출발하였다. 영상 송출과 현지 생방송을 위하여 중계차, 발전차 그리고 마이크로웨이브 송신 차량도 요청했다. 지방부장도 지방총국 기자들에게 취재를 지시한 후 합류하기로 했다.

서해훼리호 사고 현장 위치. ©황성규

#2 대책본부 앞 여관에 꾸린 취재본부

세 시간 만에 사고 대책본부가 꾸려진 부안군청에 도착했다. 필자는 가장 먼저 여관을 찾아 방 10개를 확보하고 이곳을 취재본부로 정했다. 흩어져 있던 지방국 취재팀을 찾아 모았다. 청주와 대전팀이 왔고, 전주팀은 사고 현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사고 대책본부가 위치한 부안군청에 중계차를 세팅하기로 결정했다. 팀을 사고 현장으로, 대책본부로, 병원으로, 위도로 파견했다. 구조 헬기에도 타도록 배치했고, 긴급전화도 가설했다. 사고 현장은 취재본부에서 육로로 30분, 다시 배로 40분이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취재용 선박을 확보해야 했다. 격포항으로 갔다. 어선은 모두 구조작업에 나선 상황이었다. 레저용 모터보트 2대를 찾았는데, 속도는 빠르지만 위험하단다. 무조건 확보해야 했다. 이때부터 사고 현장까지 15㎞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모터보트로 왕복했다. 얼마 후 어선도 한 척 확보했다.

 

#3 본격적인 취재경쟁 시작

사고 첫날 저녁뉴스 시간에 맞추어 취재한 화면을 중계차에서 송출했다. 하늘과 바다에서 벌어지는 구조작업, 위도 선착장의 인양된 시신들 그리고 생존자 인터뷰 장면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제부터 밤 9시 뉴스 리포트 12꼭지 가운데 6꼭지를 편집해야 한다. 펜기자가 기사를 쓰고 데스크를 거쳐 녹음한 후 방송 분량을 편집해야 한다. 편집기는 하나뿐인데 30분 안에 편집을 마치고 서울로 보내야 하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9시 뉴스가 나간 뒤 몇 꼭지의 아침뉴스를 다시 편집하고 내일 취재 작전 회의를 한다. 첫날 취재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승선 인원, 모른다. 100여 명 사망 및 실종으로 발표한다.
  • 생존자 구조, 94명이다. 다시 정정했다. 74명이다.
  • 구조작업. 해군과 해양경찰서 함정 24척, 군경 헬기와 수송기 13대가 출동해서 구조 작업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수훈자는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30여 척의 어선들이다.

 

#4 수중촬영 경쟁

서해훼리호는 수심 15m 아래 개흙에 앞부분이 박힌 채 비스듬히 누워있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군 특수부대인 UDT와 SSU가 지휘한다. 여객선 내부의 사망 실종자를 찾고, 혹시 모를 생존자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MBC는 이미 수중촬영팀이 도착해서 작업을 개시했는데 KBS 보도국에는 수중촬영팀이 없다. 제작국 소속의 수중팀을 급히 수배해 보니 남해에서 탤런트 정동남 씨와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라고 했다. 급히 달려와 주었다. 이때부터 정동남 씨는 ‘재난구조의 신’이 되었다. 물속 사정과 구조 진행 사항 등 그의 인터뷰로 KBS 뉴스가 채워졌다. 너무나 빠른 물살에 수중카메라를 놓치는 사고가 발생하여 카메라를 잃어버렸다.

 

#5 사고 일주일째

사고 대책본부는 당시까지 사망자 180명과 생존자 70명 등 250명의 서해훼리호 탑승객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221명인 정원을 이미 초과한 상태다. 실종자 가족들은 아직도 100명이 넘게 생사를 몰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6 선체 인양작업 시작

1993년 10월 17일 오전 10시 40분, 인양작업 준비를 끝낸 바지선의 대형 크레인이 줄을 당기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KBS 취재팀은 인양작업을 현장 바지선에서 생방송하기로 결정하고 방송장비를 바지선으로 옮겨 설치했다. 밤새 중계망 테스트도 진행했다. 오전 10시부터 얼마가 걸릴 지 예측할 수 없는 생방송을 선상에서 시작했다.

바지선 위에 펜기자 3명을 배치했다. 모터보트 2대에도 한 팀씩 태워 인양되는 서해훼리호 뒤편을 돌게 했다. 바지선 위의 진행자와 외곽팀은 워키토키로 연결했다. 하지만 워키토키는 30초 이상 말하면 에러가 생겨서 10초씩 끊어서 방송해야만 한다. 최초의 시도다. 줄을 당긴 지 50분이 지나 ‘서해훼리’ 네 글자가 선명한 침몰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양된 여객선에 ‘서해훼리’의 네 글자가 선명하다. ©황성규

다시 40분 간 침몰 여객선에 차있는 물을 빼는 작업이 벌어졌다. 그런데 잃어버렸던 수중카메라가 침몰선 갑판 위에 놓여 있다. KBS 로고가 선명하게 보인다. 실종자 가족들이 바지선에서, 일부는 어선을 타고 애타게 가족을 찾는 가운데 시신 수습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망자 274명, 생존자는 71명. 모두 345명이 확인되었다. 아직 생사를 확인 못한 실종자는 20여 명이다.

물을 빼는 작업 중인 서해훼리호. ©황성규

#7 선장은 살아있다?

침몰한 서해훼리호의 선장, 기관장, 갑판장이 어선에 구조되어 위도에 내리는 것을 보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 마을에 사는 우리가 그를 몰라보겠냐고 반문하는 구조 어선의 선원들 인터뷰를 근거로 검찰에서 행방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사고 발생 5일째 되는 날, 침몰된 서해훼리호 통신실에서 3명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하다 배와 함께 유명을 달리했다.

 

#8 서해훼리호 침몰 분석

  • 199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경 침몰
  • 정원 221명인데 362명 승선, 화물도 16t 실어
  • 사망 292명, 생존 70명, 실종자 없음
  • 구명정 4개 중 1개만 작동

정원의 반에 달하는 인원(141명)을 더 승선시키고, 그들의 짐까지 갑판에 가득 실은 채로 여객선이 운항해선 안 될 날씨에 안전장비 또한 제대로 갖추지 않고 항해를 감행한 결과 292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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