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이야기] ⑦ 한 가족의 헌신으로 완성한 브루클린브리지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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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이야기] ⑦ 한 가족의 헌신으로 완성한 브루클린브리지

1800년대 중반, 뉴욕으로 밀려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수요가 넘쳐 맨해튼에서는 여러 면에서 감당이 안됐다. 1800년에 6만 명이었던 맨해튼 인구는 1860년대에 140여만 명, 1890년대는 320만 명,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민자들은 맨해튼 북쪽으로 흘러 넘어갔고 일부는 이스트강 건너 브루클린, 퀸즈쪽으로 들어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저렴한 집을 찾아 브루클린 강가에서 살기 시작한 것도 이무렵이다. 이곳엔 당시 맨해튼에서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공장지역이 많았다. 이스트강을 건너가려면 배 밖에 없었다. 겨울이 되면 이스트강이 얼어붙는다. 또한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면 배를 띄우지 못해 제조된 물건 공급이 원활하게 제공되지 못한다. 그 당시 뉴욕 시내에는 적잖은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1866년 뉴욕시는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을 이스트강에 건설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곧이어 현수교 건설 경험이 있는 ‘존 로블링’이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신성한 교회 건물에 대한 도전, 브루클린브리지

1800년대 맨해튼의 최고 건축물은 교회다. 신성한 교회 건물보다 높은 것은 전부 인간의 교만한 도전이라 생각했다. 그 교만한 행동이 다리에서 나타났다. 1883년 다리의 완공으로 맨해튼의 최고 높은 건축물이자, 인간의 세속적인 건축물이 신성한 건축물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독일 이민자 출신 존 로블링은 1841년 강철을 꼬아 만든 케이블을 고안해 냈다.  이후 그의 교량 디자인은 주요한 건축 요소의 모델이 되었다. 그 당시 존은 이미 여러 개의 작은 현수교를 완성한 전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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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브리지의 중앙에 위치한 하늘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84m 석재탑. ©곽용석

브루클린브리지의 전체 길이는 1,825m다. 중간 현수교 부분은 486m. 1883년 개통했을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였다. 하늘 높이 솟은 고딕 양식의 84m인 석재탑은 독특한 실루엣의 백미를 보여준다. 오랜 세월 동안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존 로블링은 당시에 필요했던 것보다 여섯 배나 더 튼튼하게 브루클린브리지를 설계했다. 21세기의 엄청난 교통량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래층은 6차선 도로이며 위층은 인도와 자건거 도로로 만들었다. 두 개의 층으로 나누어 통행도로를 만든 점도 뛰어난 그의 안목을 볼수 있는 점이다. 130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 15만 대 이상의 차량이 이 다리를 건너고 있다.

 

대를 이은 한 가족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대작

그러나 이 훌륭한 다리의 건설 과정은 파란만장했다. 존 로블링은 프로젝트를 맡은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작업 현장 감독 중 배에서 다리를 짓이기는 상처를 입는다. 이 파상풍이 합병증으로 커져 다리 절단이라는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사망한다.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이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다리의 토대 부분 굴착 상태를 감독하기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장비 안에 들어가 물 밑 깊은 곳에서 일하다가 케이슨병(잠수병)을 얻게 된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였다. 노동자들 중에는 같은 병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많았고, 다른 사고들도 여러 차례 일어나 사망자는 27명에 이르렀다.

1870년부터 그는 거의 마비된 채 집에 머물러야 했다. 다리 건설 현장이 보이는 브루클린에서 망원경으로 보면서 멀리 아내를 통해 건설 과정을 감독했다. 14년 간의 건설기간 중 결국 13년 간은 아내 에밀리가 현장에서 엔지니어와 인부들을 감독하며 진두지휘했다. 에밀리는 워싱턴 로블링의 다리와 눈이 되었다. 대를 이은 한 가족의 헌신과 투혼으로 만들어진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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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의 헌신과 투혼으로 만들어진 뉴욕의 상징, 브루클린브리지. ©곽용석

1883년 5월, 성대한 첫 개막식에 결국 아들 워싱턴 로블링은 참석하지 않았다.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성대하게 세레모니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면서 행사를 마뜩찮게 생각했다. 그는 책임자로서 아버지와 함께 떠난 사람들의 희생과 영혼을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결국 개막식 개통 통과 행사는 아내 에밀리가 참석, 첫 통과자로서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날 1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개통 후 끊없이 몰려오는 구경꾼으로 매일 다리는 혼잡의 극을 이루었다. 그러던 6일째 드디어 사건이 터진다. 다리 중간에서 어떤 사람이 현수교의 끈이 끊어진다고 외쳤다. 놀란 군중들이 육지 쪽으로 한꺼번에 몰리는 바람에 앞쪽 사람이 넘어지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한다. 12명이 사망한다.

브루클린브리지는 19세기 말 뉴욕의 진보한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건설 이래 브루클린브리지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우러러보는 뛰어난 건축적 성과로서 중요한 랜드마크가 되어 왔으며, 한 가족의 투혼과 시간 그리고 뉴욕시의 관용성이 또 한 번의 역사적인 걸작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장엄한 인간의 성스러운 걸작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것은 건축학도들 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