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③ 청계천의 역사, 광통교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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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가는 역사 탐방] ③ 청계천의 역사, 광통교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의 굳센 각오다. 하지만 그 각오가 숨은 실력자의 분노를 사서 예상치 못한 역풍을 맞을 때의 비극에 관한 사례들도 동서고금에 숱하다. 광통교가 그 적나라한 현장 중 하나다. 지극한 자식 사랑이 끝내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조선 첫 왕비였던 자신은 260여 년 간 귀신으로도 남편과 함께하지 못한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며 태종 이방원의 계모 신덕왕후 강 비의 사연이 얽혀 있다.

태조와 태종, 부자 간의 갈등과 불화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최고 좋은 소재다. 덕분에 이 이야기는 웬만한 국민들도 역사학자 수준으로 꿰뚫고 있다. 함경도 변방의 무장 이성계가 향처(鄕妻) 한 씨와의 사이에 6남 2녀를 낳았고, 출세해 개경으로 올라온 뒤 권세가의 딸 강 씨를 경처(京妻)로 맞아 2남 1녀를 둔 일, 정도전이 정권 탈취 전략을 제시하고 이방원이 고비마다 무력을 동원해 조선 개국에 성공한 일, 이성계가 왕좌에 앉자마자(1392년) 이방원은 물론 장자 이방우를 제치고 신덕왕후 소생인 어린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 이에 불복한 이방원이 형제들의 힘을 모아 난을 일으킨 일 등등.

물론 이성계가 오로지 강 씨의 베갯머리 송사 때문에 방석을 세자 삼은 것은 아닐 것이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싶은 강 씨의 욕심 외에도, 허수아비 왕을 내세워 신권(臣權)정치를 구현하고 싶었던 정도전의 야심, 정몽주를 암살하는 등 성정이 급하고 잔인해 민심을 잃은 이방원에 대한 이성계의 우려 등이 겹친 결과일 것이다.

 

신덕왕후 강 비에게 유별했던 이성계의 사랑법

아무튼 강 비에 대한 이성계의 사랑은 유별났던 것 같다. 강 비가 1396년(태조 5년) 8월에 죽자 이성계는 신덕왕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대대적인 사역을 일으켜 정릉을 조성해 묻고(지금의 영국 대사관 터) 인근에 흥천사를 지어 강 비의 극락왕생을 빌게 했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 게 일상사가 되었다. 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그곳의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했고,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맨티스트 이성계는 죽은 신덕왕후를 그리워하고 그 소생들을 편애하지만 말고 그만큼 신의왕후 한 씨 소생 아들들의 분노와 특히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야심을 경계했어야 했다. 신의왕후 한 씨는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에 죽었는데 강 비가 정비로 채택됨으로써 본처이면서도 자동적으로 후궁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세자 방석의 후견인을 자임했던 정도전은 특히 경계를 늦추지 말았어야 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하고자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막강한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존재 자체가 왕권에 대한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사병혁파령까지 내린 상황이었다면 정도전은 잘 때도 갑옷을 입고 잤어야 했다.

 

왕자의 난 일으킨 이방원,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깊은 원한

그런데 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 정도전은 송현방(경복궁 동남쪽 모퉁이 건너편 옛 한국일보 건물 터)에 있던 남은의 첩 집에서 남은, 심효생, 이직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성계는 병중이었다. 그가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방원은 약 1.5㎞ 거리에 있는 준수방(통인동) 자신의 집에서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 남은의 첩의 집으로 쳐들어가 정도전 일당을 몰살시킨다. 제1차 왕자의 난이 터진 것이다. 궁중에서 아버지를 간호하고 있던 방간·방석 형제와 매형 이제는 “왕위고 뭐고 다 필요없다. 그저 목숨만 살려 달라”고 매달렸으나 이미 병권을 잃은 이성계는 아무 힘이 없었고, 그들은 귀양길에 나서자마자 궁궐 문 바로 밖에서 이방원의 수하들에게 맞아 죽었다.

이방원은 배다른 동생들을 죽이고 끝낸 것이 아니다. 2년 남짓 왕 노릇했던 둘째 형 이방과(정종)로부터 1400년 왕위를 물려 받은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1408년 죽자마자 신덕왕후의 묘를 파내 도성 밖 멀리 양주군(지금의 정릉)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병풍석 등 석물들은 땅 속에 파묻고 묘역에 대신들이 집을 짓고 살도록 허락했다. 또한 종묘(宗廟)에 부묘되지 못하게 했고, 강 비와 함께 묻히고 싶다는 부왕의 유언까지 들어 주지 않았다. 계모에 대한 원한이 그토록 깊었던 것이다.

계모에 대한 분풀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 도심을 관통해 흐르는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큰 비가 올 때마다 피해가 자심했다. 원래 흙다리였던 광통교가 1410년(태종 10년)에 큰 홍수로 무너졌다. 태종은 이 기회에 청계천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한편 청계천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도 돌로 만들기로 했다.

문제는 그 많은 돌들을 놔두고 굳이 그 바로 옆 정동에 묻어 두었던 신덕왕후 병풍석 등을 다시 파내 자재로 사용키로 한 것이다. 남녀노소, 반상 구별없이 누구나 ‘그 여자’를 자근자근 밟고 다니라는 이방원의 ‘악의’에서 비롯된 악행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심지어 다리 기둥으로 쓰인 어떤 신장석은 거꾸로 박혀 있는 데서 그 의도를 더 잘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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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의 병풍석을 자재로 사용하여 만든 조선시대 광통교. ©강기석

조선시대 역사를 밟다, 청계천 광통교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조선시대 돌다리 하나를 갖게 된 것이다. 원래의 광통교는 종각에서 을지로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광교사거리에 있었고 1918년 전후에는 광통교 양쪽이 철근 콘크리트로 확장되면서 본 모습이 크게 훼손됐다. 그나마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가 본격화되면서 도로 밑에 묻히고 난간기둥들도 창경궁이나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거나 영영 사라져 버렸는데 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 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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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난 광통교. ©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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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난 광통교. ©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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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난 광통교. ©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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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거듭난 광통교. ©강기석

조선 첫 여왕으로서의 신덕여왕의 명예는 1669년(현종 10년)에 종묘에 배향되면서 비로소 복구됐다. 그녀의 제사를 지내는 날 한(恨)을 풀어주는 많은 비가 내리곤 한다는데, 이를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으로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