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② 미국 중산층 은퇴자의 적나라한 민낯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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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② 미국 중산층 은퇴자의 적나라한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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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슈미트(About Schmidt, 2002)
감독 알렉산더 페인 | 출연 잭 니콜슨

 

조용한 아메리칸 클래식의 등장

<어바웃 슈미트>는 미국 중산층 은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다. 젊은 사람들은 끝까지 보기 힘들지 모른다.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머리카락을 옆으로 빗어 넘긴 늙은이가 불만스레 삐죽이거나 카메라를 게슴츠레 쳐다보는 모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렇다 할 복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석을 기다리는 심오한 주제가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 영화에 미국과 유럽의 시니어 관객은 열광했다. 2002년 칸영화제에서 초연되었을 때 관객과 평론가들은 65세의 주연배우 잭 니콜슨의 천재성을 재확인하며 이 영화를 아메리칸 클래식 반열에 올려놓았다. 잭은 “감독들도 모르는, 내게 숨어있는 ‘잭스러운’ 모든 것을 추출해냈다”고 토로할 정도로 진실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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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한 장면. 미국 중산층 은퇴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슈미트의 직업은 보험 계리사다. 사고, 화재, 사망 등의 통계 기록을 연구하여 보험료율과 보험 위험률 등을 산출하는 일을 한다. 그는 계산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의 미래도 “재혼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남은 수명은 9년”이라고 산출해낸다. 살아온 날들이 그랬듯 살아갈 날들도 모든 경우의 수에 순응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어바웃 슈미트>는 미국 중산층 은퇴자의 현실이 ‘서드 에이지(Third Age)’의 요란한 복음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실감나게 보여준다.

출근시간에 맞추어 놓았던 7시 알람을 해제했어도 자동적으로 눈이 떠지는 장면, 언제든 찾아와서 충고해달라던 후임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회사를 방문했다가 푸대접 받는 장면 등은 35년을 근무한 ‘회사 인간’의 생체리듬과 순진함을 ‘웃프게’ 묘사한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전작이자 출세작인 <선거>는 이 영화와 일란성쌍둥이 같다. 네브라스카주 오마하를 배경으로 중산층 백인들의 소소한 일상을 현미경처럼 포착하는 능력. 비극 속에서 희극을, 희극 속에서 비극을 빚어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는 초반에 몇 가지 그림을 설계한 뒤 로드무비로 직행한다. 잭 니콜슨으로서는 세 번째 로드무비다. 로드 무비는 길 위의 인생을 묘사하는 서사방식으로서 1960년대 뉴웨이브가 창안한 표현방식이다. 잭이 바이커 히피들에 합류한 변호사 역으로 첫 선을 보인 <이지 라이더>(1969년)는 오디세이 무비의 전설이 됐다. 바야흐로 40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오토바이 대신 35피트짜리 아방궁 같은 캠핑카를 몰았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한 장면. 주연을 맡은 잭 니콜슨은 진실한 연기를 보여줬다.
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한 장면. 주연을 맡은 잭 니콜슨은 진실한 연기를 보여줬다.

삶의 비극을 품은 희극

영화는 도처에 웃음보따리를 깔아놓았는데, 그중에서도 뛰어난 두 가지 장치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슈미트가 지구 저편의 흑인 고아에게 보내는 편지의 독백. “딸네 가서 대접 잘 받았다”는 허풍이나, “네가 대학에 들어가면 동아리 활동은 꼭 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가당치도 않은 아버지 행세에는 폭소를 참을 수 없다. 은퇴 노인의 현실을 그린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이 영화를 최우수작으로 꼽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유머 감각 때문이다.

두 번째는 딸아이의 결혼식을 위해 방문한 덴버 촌구석의 사돈네 집 구경이다. 블루칼라 보헤미안 가정과 구성원들의 거칠고 대책 없이 태평한 인생, 부르주아 화이트칼라 슈미트가 이 ‘황당생경함’ 속에서 딸을 구해내려 분투하고 실패하는 과정, 안사돈이 알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쿠지 신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계층 사람들이 얼마나 굳건하게 땅에 발붙이고 사는지, 얼마나 육체의 욕망에 솔직한지를 알게 되는 것이 슈미트의 성장통이라 할까?

<어바웃 슈미트>는 퇴임식-장례식-결혼식이라는 의례를 차례로 통과하면서 진행된다. 그리고 인생이란 기만과 실망의 반복에 다름 아니라며 미국식 ‘Can-Do’ 정신에 유쾌한 일격을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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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바웃 슈미트>의 한 장면. 주인공 슈미트는 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오늘은 슈미트(66세)가 평생 다닌 보험회사에서 정년퇴직하는 날이다. 젊은 후임자의 번드레한 치사와 동료의 헛소리 같은 격려사를 듣고 귀가한다. 43년을 함께 산 뚱보 마누라는 볼수록 밉상이다. 변기에 앉아서 쉬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냄새도 난다. “내 집에 살고 있는 이 늙은 여자는 누구인가?” 지구상에 슈미트가 조건 없이 사랑하는 존재는 오직 딸내미 하나. 하지만 딸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물침대 팔아먹고 사는 덜 떨어진 자식과 동거 중이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 무료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루에 17센트만 내면 된다는 TV 광고를 보고 탄자니아의 여섯 살짜리 고아 소년 하나를 후원하기로 한다. 소년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슈미트. 신상 소개로 시작한 글들은 어느덧 슈미트의 ‘감정 배수구’가 된다. 누구에게도 발설 못했던 속내, 가족과 사회에 대한 분노와 외로움을 내갈기듯 써 보낸다.
아내가 돌연사한 후에야 슈미트는 비로소 자신이 아내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유품을 정리하다가 아내가 자신의 ‘절친’과 외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길이 날뛰다 못해 친구를 찾아가 주먹을 휘두르고….
절망과 고독에 사로잡힌 슈미트는 불현듯 딸아이의 결혼을 막자는 미션을 설정하고 먼 길을 떠나기로 한다. 사돈집에 도착하여 양가 인사를 하고 보니 이 집구석은 문자 그대로 ‘콩가루 집안’이다. 다단계 판매로 간신히 호구하는 사위놈은 물론이고 시어머니감은 한술 더 뜬다. 이 여자는 남녀관계의 모든 것을 섹스로 귀결시키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다. 심지어 사돈인 슈미트에게까지 들이댄다.
중산층 가정에서 고이 키운 외동딸을 이 한심한 집구석에 보낼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딸은 아버지가 수표나 끊어주고 조용히 있기만 바랄 뿐이다. 속수무책으로 결혼식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슈미트. 귀갓길에 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며 그는 처량하게 중얼거린다. “그래, 이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 모두 그저 티끌이 아니던가. 이 세상이 나 때문에 털끝 하나라도 좋아질 게 뭐 있겠는가?”
집에는 소년의 첫 답장이 도착해 있다. ‘매일 당신을 생각한다’는 글과 그림을 보며 슈미트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른다.

※ <The Third Age>는 윌리엄 새들러의 책 제목. 마흔 이후 30년 간을 인생의 3단계로 지칭하며, 개개인의 마음가짐과 삶의 방식에 의해 노후가 규정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