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기억과 흔적] 우리나라 첫 태극마크 야구팀은?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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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기억과 흔적] 우리나라 첫 태극마크 야구팀은?

전후 폐허에 찾아온 낭보

단기 4287년(1954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는 2면에 한국 야구의 첫 국가대표팀이 이룩한 쾌거를 알리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4년 당시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 네이버 라이브러리 캡쳐. ©동아일보
제3위를 獲得(획득) 아주야구 우리 대표 중국팀 격파비율빈(필리핀) 수도 마니라(마닐라)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야구연맹전’에 출전한 우리 한국 대표팀은 25일의 경기에 있어서 중국팀을 4대2로 당당 격파함으로서(격파함으로써) 제3위를 찾이하였다(차지하였다). (이후 생략)

1954년 5월 17일 결성된 아시아야구연맹(BFA)은 그해 12월 18일 필리핀에서의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가맹국에서 돌아가며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제1회 대회에는 대한민국, 일본, 중화민국, 필리핀 4개국이 참가했다. 원년 우승은 일본을 8대1로 누른 필리핀(3전 3승)이 차지하였고 일본이 준우승을 했다.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첫 한국 국가대표 야구팀의 자랑스러웠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단장 이홍직, 감독 김영석, 코치 오윤환, 심판 이신득
투수 유완식(36세), 김양중(25세), 서동준(19세)
투수 겸 좌익수 박현식(26세)
포수 김영조(36세), 장석화(32세)
1루수 김정환(27세), 심양섭(34세)
2루수 박상규(30세), 김계현(36세)
3루수 이기역(28세)
유격수 강대중(34세), 이덕영(31세)
중견수 허곤(25세), 장태영(25세)
좌익수 노정호(38세)
우익수 홍병창(37세), 정관칠(32세)
총 선수 18명, 평균연령 31세

이 당당했던 선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2014년 10월, 마지막 국가대표 선수였던 서동준 옹이 세상을 떠났다. 선각자적 야구의 삶을 살았던 많은 야구 원로들이 이 땅 곳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1950~1960년대를 풍미했던 전후의 용사 야구인들의 족적이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희미하게 잊히는 듯하여 마음이 사뭇 편하지 않다.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기 무섭게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까지 겪으며 이 땅은 온통 폐허로 변했다. 그 전쟁의 와중에도 수복지(收復地)를 중심으로 전국체육대회 야구 경기(1951년 10월, 광주), 제7회 전국도시대항대회(1952년 10월, 대전), 제5회 쌍룡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1953년 8월, 부산), 제2회 광복절 경축기념대회(1953년 8월, 서울), 제8회 청룡기 쟁탈 전국중고교야구선수권대회 서울시 예선과 본대회가 열렸다(한국야구사연표 참조). 모든 게 열악했던 그 시대에 멈추지 않고 이어진 야구 경기는 작은 희망일 수도 있었겠다. 그 끈질긴 뿌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국가대표팀을 구성하고 국제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싹을 틔운 것은 아닐까?

 

창대한 끝을 원한다면 미약한 시작을 기억해야

한국대표팀의 웃지 못할 일이 하나 있다. 참가국 중 가장 가난한 나라이기에 생긴 슬픈 사연이다. 1999년 발간된 <한국야구사> 서술과 KBO 야구박물관자료수집위원회 홍순일 위원장의 고증을 종합하여 설명해 보면, 한국팀은 12월 15일 대한민국항공사(KNA)의 일반 여객기 편으로 장도에 올랐다. 선수단은 단복을 맞추어 입었는데 겨울이라 여름 옷감을 구할 수 없어 흰 옷감에 감색 물을 들여 입고 떠났다. 필리핀 마닐라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닐라의 후텁지근한 날씨 때문에 갑자기 단복 물감이 빠지기 시작한 것. 이에 주무가 시내에 나가 반소매 티셔츠를 구입해와 갈아입었다. 이 티셔츠가 한국팀의 첫 단복(?)이 된 것이다.

박동희의 야구탐사 ‘잊힌 60년 전설 최후의 국가대표 1편’ 김양중 선생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전한다. “전란 중에 야구인이 희생되고 야구 경기도 중단된 통에 유망주가 자라지 않아 막상 아시아야구대회 대표팀 참가 선수들을 소집하려니 젊은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과거 일제 하에서 뛰던 30대 노장 선수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의 평균연령 31세. 스포츠 선수로선 환갑이나 다름없던 그들이 바로 첫 대표팀을 꾸린 것이다. 당시 유니폼에는 태극마크가 아니라 서울클럽(SC) 마크가 새겨졌을 정도로 우리는 초라하게 시작했다. 선수들은 소집부터 비행기를 타는 일, 경유지 홍콩에서의 관광, 필리핀의 날씨 그리고 천연잔디 구장, 밤에도 경기를 벌일 수 있는 조명시설 등 선진의 발전에 내심 눈이 휘둥그레졌을 일이다.

 

한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들

이런 첫 국가대표 멤버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는 한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들이기 때문이다. 좋고도 혹독한 선배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프로야구의 호황으로 젊고 유능한 선수, 어디서든 내가 좋아하는 선수의 프로필은 물론 신문 기사나 경기 중계를 마음껏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시대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풍요를 누리는 후대로서 잊혀가는 그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같은 스타 선수들을 기억하고 야구의 미래를 더 훌륭하게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고서 어찌 좋은 가지,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야구 역사를 꾸준히 연구, 발전시키는 사학적, 고고학적 접근에서 야구 역사를 밝히고 세우고 그 바탕으로 야구의 미래를 건강하게 설계해 나간다면 야구인은 물론 모든 부문에서 모범이 되는 스포츠로 더 사랑 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가 2012년부터 한국 명예의 전당과 야구박물관을 건립하는 일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야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건 우리나라 야구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Marie C Fields/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