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기억과 흔적] ‘타격의 달인’ 장효조를 기억하라 – 전성기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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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기억과 흔적] ‘타격의 달인’ 장효조를 기억하라

“배트를 거꾸로 잡고도 3할을 친다.”
“만화야구의 원조다.”
“공의 실밥까지 보고 타격했다.”
“장효조가 치면 스트라이크 안 치면 볼이다.”

타석에 들어선 그의 다부진 자세, 공 하나하나에 혼신을 다해 쳤던 모습, 그에게 쏟아지던 찬사가 아직도 우리의 귓전을 울린다. 장효조 선수 이야기다. 2011년 KBO 리그 30주년 레전드 올스타로 선정된 뒤 한 달여 만인 9월 7일 58세의 나이로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일주일도 채 안 된 9월 14일 무쇠팔 최동원 투수도 같은 하늘에 올랐다. 2011년은 야구계의 불세출 선수 두 명을 동시에 잃은 슬프고도 잔인한 한 해였다.

 

안타 제조기, 영웅의 탄생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지만 대구 삼덕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한 장효조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과 민첩성으로 감독의 총애를 듬뿍 받은 선수였다. 1972년 대구상고에 입학하면서 그는 ‘타격의 달인’이라 불리며 타격왕의 자리를 독식하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4개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0.383라는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1976년 한양대 시절 제26회 백호기 쟁탈 전국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면서 0.714(14타수 10안타)라는 놀라운 타율로 타격상을 수상했다. 포항제철을 거쳐 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친 장효조는 1983년에 계약금 4000만원에 연봉 2400만원을 받고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그해 장효조의 신기(神技)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92경기에서 타율 0.369(1위), 안타 117개(1위), 장타율 0.618(1위), 출루율 0.475(1위), 홈런 18개(공동 1위), 도루 22개(4위) 등 신인답지 않은 모습으로 모든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안타 제조기 장효조가 비로소 자신 안에 담아 둔 마그마를 분화구로 내뿜어댔던 해였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 팬북에 실린 장효조 타격 모습. ⓒ이호근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가 된 영웅

지난 9월 6일 삼성 라이온즈는 대구구장에서 열린 기아 타이거즈와의 홈경기에서 앞서 고(故) 장효조 전 2군 감독의 4주기 추모행사를 가졌다. 이젠 추모만으로 우리 마음에 간직된 선수가 되어버렸으니 경기가 끝난 텅 빈 야구장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씁쓸하다.

올해 들어 기록 제조기라 불리는 NC 다이노스 외국인 타자 에릭 테임즈가 숱한 기록 달성으로 장효조 선수의 전성기를 기억하게 할 만큼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2015년 정규 시즌을 마친 현재, 142경기에 타율 0.380(1위), 출루율 0.497(1위), 장타율 0.791(1위), 득점 130점(1위), 홈런 47개(3위), 타점 140점(2위), 도루 40개(5위)를 기록했다. 1983년 장효조와 너무 닮았다. 테임즈는 한 시즌 두 번의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했고, 10월 2일에는 40홈런-40도루를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달성하는 신기원을 세웠다. 앞으로도 깨기 힘든 탑을 쌓았다.

장효조는 1983년 압도적인 타율로 타격왕을 한 데 이어 1985년, 1986년, 1987년 내리 3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다. 10년 후인 1993년에 장효조의 등번호 10번을 물려받은 양준혁도 타격에 대한 역사를 함께 썼다. 1993년에 데뷔해 타율 0.341, 홈런 23개, 안타 130개로 타격왕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역시 1996년, 1998년, 2001년 등 통산 네 차례 타격왕에 올랐다. 프로통산 0.316의 타율로 장효조의 통산 타율 0.331을 넘지는 못했지만 한국 프로야구 타율 1위, 2위의 기록을 세우고 있다. 특히 장효조의 통산 타율 3할3푼1리는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래오래 기억될 우리의 슈퍼히어로

장효조는 상복이 없기로 유명하다. 그의 독해 보이는 이미지 혹은 외골수적인 기질로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했다. 아무래도 친절하고 다가서기 쉬운 사람에게 상복도 쉬이 넘어갔으리라. 2011년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지금은 MBC 스포츠+ 해설위원이며, KBO 육성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이만수 전 감독은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장효조 선배는 처음에는 다가가기 힘들지만 속정이 깊은 분으로 기억한다. 슬럼프에 빠져 힘들 때 타격하는 방법, 많이 뛰어야 근육이 부드러워진다며 평상시 운동법을 자상하게 일러준 훌륭한 선수이며 나와는 수준이 다른 선배로 추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효조에게도 복병은 있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 투수였다. 1983년 5월 25일자 경향신문 지면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장명부에 맥 못 추는 장효조, 최고의 투수·타자』라는 제목 하에두 장 씨의 대결은 1983년 최고의 투수·수위타자의 만남이라는 데에 각별히 관심을 끌고 있다. 현역선수 가운데 한국이 낳은 최고의 교타자(단타를 주로 노리는 타자)라는 장효조가 장명부에 말려 쩔쩔매는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중략) 투구 이론에 밝은 김인식(동국대) 감독은 “상대 투수가 누구라는 걸 의식하는 자체가 이미 절반을 지고 들어가는 셈이다. 꼭 이기겠다는 욕심이 자연스러운 스윙을 허물어뜨린다.” (중략) ‘장명부는 어려운 상대’라는 강박관념이 그렇게 부드럽고 날쌔던 장효조의 스윙도 장명부 앞에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뻣뻣이 굳어지는 것도 그 때문.

장효조·장명부 대결에서 장효조는 전기리그 15타수 1안타 6삼진, 후기리그 5타수 4안타 4타점으로 갈수록 장명부에 익숙해진 결과를 볼 수 있다. 그해 최고의 타자로 우뚝 선 장효조만의 끈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 곁을 좀 일찍 떠나긴 했지만 지금 그 어느 곳에서 2015년 한국 야구의 가을 축제를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을 것이다. “후배 선수들! 평상시 건강관리 잘하면서 자신과 싸우고 혹독히 연습하고 공의 실밥까지 보고 공을 치게나”라고 하며 생전에 환하게 웃던 그 모습으로 후배 선수들에게 말하고 있다.

2013년 3월에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영원우표(추억의 인물 시리즈)로 2011년 9월 나란히 우리 곁을 떠난 한국 야구의 영웅 고(故) 장효조 선수와 고(故) 최동원 선수의 경기 모습을 담았다. ⓒ이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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