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대한민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 전성기뉴스
콘텐츠 바로가기

top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대한민국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31명(2015년 10월 현재)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 있다. 우리나라 여의사 제1호 김점동(金點童, 1876∼1910년)이다. 김점동은 구한말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힘들었던 시절 정규 의학 교육을 받은 한국 최초의 여의사로서 34세의 마지막 순간까지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척박한 당시의 환경에서 여성의 몸으로 열정과 집념으로 의사의 꿈을 이룩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후세 사가들은 이 ‘여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김점동. 그녀는 한국인 최초의 여의사다. ⓒ신종오

김점동, 여걸 의사의 탄생

그녀는 1876년 서울 정동에서 김홍택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이나 국문학자 주시경과 동갑내기다. 김점동은 1886년 열한 살 나이에 이화학당에 입학한다. 이화학당은 1885년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스크랜튼 부인이 소녀 교육을 위해 세운 학교로 첫 해에는 학생이 없었다. 여성의 신식교육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양반집에서 자식을 보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니 설립 이념과는 달리 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입학했다.

김점동은 아펜젤러 선교사의 잡일을 도와주고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학당에 들어갔다. 학구열이 높기도 하였지만 선교사들과 자주 어울릴 수 있었던 덕분으로 특히 영어 실력이 뛰어났다. 1890년에 졸업하자마자 보구여관(保救女館)에 취직이 됐다. 새로 부임한 선교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년)의 통역으로 뽑힌 것이다.

보구여관은 이화학당 구내에 세워진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으로 1892년 동대문에 분원(이대 동대문병원의 전신)이 설치되면서 로제타를 따라 그녀도 자리를 옮겼다. 통역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의료 조수 노릇도 했다. 셔우드가 병을 고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자기도 의사가 되리라 결심하게 된다. 그러면서 틈틈이 의학 지식과 술기를 부지런히 익혔다. 신앙심도 높아 1891년에는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7세 김점동은 당시 풍습에 따라 결혼을 해야만 했다. 의사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고민하는 그녀를 위해 선교사들이 나섰다. 함께 일하던 로제타의 남편 윌리엄 홀이 그의 조수로 있던 9년 연상의 박유산을 소개했다. 박유산은 원래 홀의 마부로 고용된 사람이다. 그는 홀과 함께 여행하면서 기독교에 감화됐고 세례까지 받았기에 홀은 김점동의 신랑감으로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93년 26세 총각과 17세 처녀는 결혼을 한다. 이때부터 김점동은 박에스더(朴愛施德)로 불리게 된다. 신랑의 성에 세례명을 붙인 것이다.

김점동과 박유산 부부
26세 박유산과 17세 김점동 부부. ⓒ신종오

위기를 기회로, 기회의 땅 미국에서의 새출발

첫 위기가 닥쳤다. 결혼 이듬해인 1894년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홀의 아내 로제타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점동은 그토록 하고 싶어 하던 의학 공부를 위해 미국에 데려가 줄 것을 간청했고, 그의 염원을 잘 알고 있던 홀 여사는 젊은 부부를 미국으로 데려갔다. 1894년 12월 둘은 미국에 도착한다.

낯선 미국에서 김점동은 남편과 함께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남편도 생활비와 아내의 학비를 위해 막노동을 하며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하였다. 1895년 2월, 그녀는 뉴욕주 리버티에 있는 공립학교에 들어가 고등학교 과정을 밟았고 9월에는 뉴욕 시립 유아병원에 들어가 일을 하는 한편, 의학교 입학에 필요한 라틴어, 물리, 약리학, 수학 등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896년 10월 그토록 소망하던 볼티모어여자의학교(존스홉킨스의대 전신)에 입학했다. 기록에 따르면 김점동은 모든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쳐왔다. 남편이 오랫동안 폐결핵을 앓다가 졸업을 몇 주일 앞둔 1900년 4월 세상을 뜬 것이다. 그러나 김점동은 좌절하지 않았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4년 공부를 마쳤고 의학교 졸업장을 거머쥐었다. 1900년 6월 그녀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김점동의학교졸업학위사진
의학교 학사모를 쓴 스물네 살의 김점동. ⓒ신종오

그 해 10월 김점동은 선교의사가 되어 귀국하여 그녀가 일했던 보구여관에서 책임의사로 의료 활동을 시작했다. 김점동은 1903년 홀 여사가 다시 내한하여 평양에서 죽은 남편을 기리는 뜻의 기홀(紀忽)병원을 세우자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양에서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틈만 나면 벽촌으로 순회 진료를 떠났다. 기홀병원 부속 맹인학교와 간호학교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녀는 1909년 4월 외국 유학생 환국 환영회에서 고종 황제로부터 은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김점동 역시 남편과 같은 결핵에 걸려 1910년 4월 아무런 소생도 남기지 않은 채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서울에서 3년, 평양에서 7년, 도합 10년의 헌신적인 의료활동은 여전히 많은 의료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런 공적이 인정되어 김점동은 2006년 11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대한민국 여의사 1호

당시 헌정 추천서에는 ‘우리나라 첫 번째 여성 의사로서 과학기술 분야 여성 참여의 초석이 됐으며, 과학적 치료법을 알지 못했던 일반 서민들에게 질병의 예방과 의학적 치료 방식을 널리 알려 사람들로 하여금 의학에 대한 인식을 갖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첫 여성 의사, 첫 여성 과학자로서 여성에 대한 기존의 제약과 통념을 극복했으며, 황해도,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무료 진료활동을 펼쳐 의사로서 철저하게 사회적 헌신을 했고, 맹아학교와 간호학교 설립에 기여해 교육과 사회 발전에 기여한 점’ 등이 주요 공적사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화여대 의대 동창회에서 제정해 2008년부터 시상하는 ‘자랑스런 이화의인(梨花醫人) 박에스더상’ 역시 오래도록 그를 기억케 해줄 것이다. 김점동의 이야기에서 크리스마스실에 얽힌 이야기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결핵퇴치사업을 위해 매년 발행되고 있는 크리스마스실은 1932년에 선교사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1991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결핵전문가로 1926년 한국으로 건너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요양원인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으며, 1932년에는 남대문이 도안된 첫 실을 발행했다. 그가 바로 부부 선교의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 부부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전염병으로 34세에 돌아가셨고 이모처럼 따르던 김점동 역시 34세의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기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크리스마스실 발행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김점동과 박유산, 로제타 홀과 아이들  1895.9
김점동과 박유산 부부 그리고 후원자인 로제타 홀과 그의 아이들. ⓒ신종오

신종오(전 중앙일보 과학부장)
신종오(전 중앙일보 과학부장) 모든기사보기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과학부장을 지냈다. 이후 삼성전관(SDI) 홍보실 이사, 민족의학신문 편집인, (사)과우회/기술경영연구원 이사를 역임했다.

관련 기사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댓글을 남겨 주세요 회원이신가요?

  • 2015-11-13 11:56:35

    좋은기사 잘읽고갑니다 ^^

  • 유히왕 2015-11-12 17:19:55

    예전에 이분 이야기를 tv에서 본 적이 있어요. 정말 멋진 여성이에요. 존경스러워요~!

  • 박재연 2015-11-12 09:43:36

    이런 분이 계신 줄 몰랐어요. 유교적 여성관이 강요되던 시대에 정말 의미있고 용기있는 길을 걸으셨네요. 동기부여가 됨!

  • 띠부띠부씰 2015-10-28 09:36:41

    그 시대에 쉽지 않았을 결정인데 사진에서 열정과 결의가 보이는 분 같습니다. 대단하네요.
    병을 이겨내고 더 오랫동안 귀감이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